Emile Durkheim
뒤르켐의 생애 및 교육학 관련 업적
뒤를 껨은 1858년 프랑스 동부에 피나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랍비(유대교의 율법 학자)로서 일찍부터 뒤르켕이 가족의 전통을 이어 유대교에 봉사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뒤르켕은 교사라는 세속적인 직업을 선택했고, 1887년 보르도대학에서의 교수를 시작으로 1917년 그가 죽을 때까지 파리대학에서 강의했다.
뒤를 껨의 교육학 강의는 크게 세 가지 주게·도덕과 지성 교육에 대한 일반적 강의, 교수 방법과 교육의 역사에 대한 강의, 심리학의 기능들과 교육에의 적용에 대한 강의로 이루어졌다.
그가 행했던 강의 제목으로는 '초등학교에서의 도덕교육', '교수학의 역사', '교수 원리', '교육론자들에 대한 설명', '고대의 교수법과 교육', '프랑스 중등교육의 역사' 등이 있었고, 심리학과 관련해서는 '교육에 대한 심리학의 적용', '감정과 활동', '심리학 공개 강의' 등이 있다.
뒤르켐 교육사상의 시대적·사상적 배경
- 시대적 배경
1870년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뒤르켕의 고향 인에 삐 날은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점령되고, 뒤를 껨이 죽은 후에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프랑스의 패전은 제3공화정의 탄생을 낳았고,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뒤를 껨이 전 생애를 보낸 프랑스의 제3공화정이기는 혼돈의 시기였다.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급의 급진파들은 공화파의 집권에서 소외되면서 갈등을 빚고 공화파의 왕정 파 간에는 군부의 이해관계가 작용하여 많은 프랑스의 지성인들이 공화정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갖게 한 드레퓌스 대위 사건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프랑스 사회의 혼란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 대안을 모색하지 않고 단순히 머릿속의 사회 개혁안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뒤를 껨은 사회를 개혁시키는 데 대한 하나의 과학적 대안을 제시할 뿐 아니라 분열되고 무질서한 프랑스 사회 속에서 정신적 학문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그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즉 뒤를 껨은 무너지는 프랑스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새로운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시민 도덕을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인간 존재들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1870년 독일에서 패한 원인이 교육에 있다고 보고 교육의 세속화를 강조하였다. 교육에 있어서 세속화란 교육의 목적과 내용, 방법까지 교육의 모든 과정이 교회로부터 벗어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1971년 이후 교육으로부터 교회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시작하였고 1881년의 회피법에서는 공립 초등학교를 무상화하였고 1882년 회피법에서는 의무적이고 세속적인 초등교육을 법으로 정하고 교육에 대한 국가의 권한을 확고히 하고 확대해 나가기 위해 시작하였다. 결국 프랑스 사회와 뒤를 껨이 추구한 것은 '세속화된 프랑스'였던 것이다.
- 사상적 배경
뒤를 껨의 사회과학적 인식론에 영향을 준 학자들로는 몽테스키외, 루소, 생시몽, 콩트, 스펜서 등이 있다.
- 몽테스키외: 몽테스키외는 사회연구에 전적으로 새로운 접근방식을 도입한 사람이었다. 뒤를 껨은 몽테스키외로부터 사회 세계를 하나의 '사물'로 연구해야 한다거나, 그것을 위해서는 유형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최선이며, 그러한 유형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구성 부분들의 수, 배열 및 그들 간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법을 포괄적인 사회적·문화적 힘을 표현하는 지표로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인과 분석과 기능분석 모두를 활용하는 것이 갖는 의미 등을 전수하였다.
- 루소: 루소는 몽테스키외의 사회과학에 대한 인식은 전혀 담지 않으면서도 사회질서의 본질에 관한 그의 인식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는 철학적 교외를 내놓았다. 뒤를 껨은 사회 병리 현상에 대한 루소의 핵심적인 개념 중의 일부- 아노미, 이기주의 강제적 분업에 대해 영향을 받았다. 사회를 강력한 국가와 공통의 가치와 신념에 의해 통합된 것으로 보는 그의 시각 역시 이러한 병리 현상을 세속적인 사회에 대해서도 갖게 하기 위하여 학교 제도를 활용하고자 한 그의 열망 또한 루소에 의해 고무된 것이다.
- 생시몽: 뒤를 껨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생시몽이라고 할 수 있다. 생시몽의 사회학은 콩트에 영향을 주었고 뒤를 껨으로 이어졌다. 뒤를 껨은 콩트의 사상이 쌩 시몬의 사상을 반영하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고 생시몽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비중을 두었다. 뒤를 껨에 영향을 준 생시몽의 사회사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사회의 변화는 어떤 필연적 법칙을 따라서 이루어지고 이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에서 스는 것과 같은 실증적 방법을 인간의 역사 연구에 적용함으로써 잘 관찰된 과거로부터 미래를 쉽게 연역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통사회를 개고 새롭게 태어나는 산업사회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도덕 체계를 찾는 것이었다. 도덕의 새로운 원칙이란, 사회도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특수한 이익들이 일반 이익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과 새로운 산업사회의 등장과 함께 확산하는 사회성원들의 이기주의를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기독교의 박애 정신을 고양하고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콩트: 과학은 자료에 근거해야 하고 그로부터 인간조직에 관한 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는 뒤를 껨의 인식은 어떤 다른 사상가들보다도 특히 콩트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이는 그가 콩트의 방법론적 기법들을 수용하고 있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뒤를 껨 사회관의 실제적 내용 역시 공터의 강조점·분화된 단위들이 어떻게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관념들이 어떻게 그러한 통합과 관련되는가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 스펜서: 뒤를 껨은 스펜서의 사회이론으로부터 사회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것과 따라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인 방법론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뒤를 껨은 위의 사상가들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라고 보았다. 즉, 사회적 사실 그 자체들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알고자 하는 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가 생각했고 설명해야 하는 가설을 입증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뒤를 껨은 보다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자연과학에 가까운 사회학을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교육이나 도덕도 어떤 당위성을 논하기에 앞서 사회적 사실로써 객관적으로 파악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뒤를 껨의 시대적·사상적 배경은 그가 철저히 사회에 기초한 그리고 사회에 관한 학문을 하고자 했던 만큼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그는 위기의 사회를 경험하면서 문제 해결과 사회 문제의 원인데 되었던 개인의 욕구와 사회의 이상 사이의 갈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둘째, 근대 사회의 새로운 가치 또는 새로운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세속화를 구현하는 데 집중하였다. 셋째, 사회과학적 인식론의 발달 속에서 성장하면서 그는 문제 해결의 방법을 사회과학에서 찾음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추구가 아닌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 그 가운데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