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사유형식과 교육
듀이로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은 한국의 교육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현대교육사를 통해 볼 때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 근거한 교육이론은 한국의 교육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이제라도 프래그머티즘과 한국 교육의 연관성을 반성적 태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어느 교육이론이 옳거나 혹은 틀렸다는 식의 단정적 평가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교육 현실을 진단하고 그 미래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한국은 그때까지의 일제 식민지교육관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교육을 새로 정립해야 할 상황에 맞이하였다. 이때 미국에서 발달한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사상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고, 미군정 하의 한국은 자연히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을 수용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교육과 문화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듀이의 민주주의 교육사상과 교육 방법론은 "새교육운동"이란 이름으로 한국에 등장하여 교육계에 "듀이 붐(boom)"을 일으켰다.
실제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표방한 한국은 교육체제 역시 정치체제에 상응하게 개편하는 과정에서 듀이나 프래그머티즘 교육사상의 내용을 제대로 소화할 겨를도 없이 수용하는 일에 급급하였다. 프래그머티즘 교육이론에서 주장되었던 아동 중심 및 생활 중심의 교육이 소개되었으며 어린이의 개성 존중, 어린이가 자발적으로 주도하는 학습, 경험 중심의 단원학습, 시청각 교구를 이용한 간접지도법, 생활 중심의 과외활동이론 등이 그에 내재한 철학적이고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지 못한 채 즉흥적으로 소개되고 전수되었다. 이러한 여러 상황적 요인에 힘입어 듀이의 교육이론과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사상은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고 "새교육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미 앞에서 다룬 바와 같이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창시자인 피어서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분명한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어떤 실제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며, 이러한 실제적 결과의 개념이 바로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지기는 개념의 전부라고 보았다.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경험에 의해 세계를 파악한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 세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경험에 의해 걸러진 세계이다. 우리는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며, 이 상호작용의 내용에 따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적 기반에 근거하는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사 사이나 듀이의 교육이론에서 말하는 교육은 현재의 생활 그 자체이지 생활과 동떨어진 미래를 위한 준비가 아니다. 교육은 생활 속의 경험을 재구성하는 과정으로서 획득한 경험을 소화하고 그 내용을 조직화하여 앞으로 있을 새로운 사태에 창의적으로 대비토록 하는 일이다. 교육은 생활 중 심으러 진행되어야 하며 어린이의 흥미와 연관되어야 한다. 또한 모든 학습의 과정에서 어린이들이 흥미에 의해 자발적으로 노력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학습은 교사나 교과서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어린이의 흥미와 관심이 반영되는 과정이며 또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한 어린이의 자발적인 준비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학교는 항상 사회와 상호작용함으로써 사회의 진보에 조력하는 기관으로 이해되고 있다. 교육은 사회적 삶을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수단이며 사회개선의 과정이다. 여기서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로서 모든 사람이 공동의 관심사에 참여하고, 경쟁보다는 협동이 중시되며, 개개인의 문제해결 능력이 모이는 곳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회에서는 어린이가 중심이 되는 교육, 생활과 참여의 교육, 어린이 개개인의 흥미와 관심이 존중되는 교육이 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교육이론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어 사회·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있던 한국이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정착시켜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민을 민주시민으로 육성해야만 한다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안으로 간주하였다. 당시는 한국 자체의 필요성 때문에라도 프래그머티즘 교육이론의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미군정기에 미국의 교육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지도하게 되었으며, 한국의 학자들도 미국으로 파견되어 미국의 교육학을 현지에서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미국 유학 교육학자들이 귀국한 뒤 활동하면서 한국 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은 결정되었다.
실제 듀이와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이 이렇듯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는 하지만, 이를 비판 없이 수용한 점에서 그 이론에 대한 재평가와 반성적 성찰이 요구된다. 그러한 점에 대해서는 듀이의 철학과 교육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데 급급했던 관계로 듀이나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이미 제기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제까지의 듀이 연구가 그의 "경험" 개념을 곡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듀이의 교육이론이 부당하게 비판되고 있다는 견해 역시 최근에 대두되었다. "듀이의 경험 개념에 비추어 보면, 지금까지의 교육학에서의 듀이에 관한 연구는 오해의 역사"라는 것이다. 듀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주장들은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으며,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제기된 문제들이 점차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듀이의 교육이론이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한국의 교육에 기여한 점은 간과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나 우리는 듀이와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이 한국에 이미 주었고 또 지금도 주고 있는 영향력을 비판적 관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 한 가지를 든다면 듀이의 교육이론에서 나타나는 교육을 사회화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성이 한국의 교육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물론 그가 여러 글에서 교육에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이 함께 하고 있음을 서술하고는 하지만, 그가 제시한 교육이론의 전반적 흐름이 교육을 사회화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은 나면서부터 사회환경 안에서 생활하면서 성장 및 발달해 간다. 따라서 교육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영위되어야 하는바, 사회에는 일정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요소들이 있다. 교육은 이러한 인간의 사회생활을 유지하고 존속시키며 더 나아가 개량하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듀이는 교육이 추구하는 바를 "경험의 질을 변형시켜서 (교육하는) 당시 사회집단의 관심과 목적과 관념에 합치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그의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은 사회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교육이 사회의 이상이나 관심을 반영하는 일은 당연시된다. 사회에서 요청되는 바를 교육의 힘을 빌려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경험의 연속적 과정이고 그 재조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듀이의 이러한 교육이론의 경향은 한국의 교육 현실을 구성하는데 그 나름의 부작용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비록 '아동 중심', '어린이의 흥미와 자발성' 등을 강조하면서 피교육자로서의 어린이를 중시한다지만 교육의 궁극적 관심은 사회의 개선과 진보에 있으며, 결국 어린이는 그러한 사회적 변화 과정을 위한 역할담당자가 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듀이는 「나의 교육 신조」라는 글에서 교육의 사회적 관점을 다음과 간이 피력한다:
"(···) 내가 믿는 바로는, 교육을 받는 개인은 사회적 개인이며, 사회는 개인의 유기적 통합체이다. 아동에서 사회적 요인을 빼어 버리면 남는 것은 무기력하고 생명 없는 덩어리뿐이다. (···) 아동의 능력과 관심과 습관은 끊임없이 다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매 단계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회적 맥락에 비추어,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사회에 어떤 봉사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용한 글에서 보듯이 듀이는 인간의 개별적 입장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사회가 개인에 대해 지기는 우위는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교육》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개인적 측면을 완전히 배제한 채 극단적으로 사회의 관점에서만 교육의 개념을 정의하려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듀이의 교육이론에서 인간존재에서 본질적인 여러 차원 가운데서도 사회적 차원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듀이는 인간 행위의 " 사회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은 서로 동일하다"고 만하다. 듀이가 '도덕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최대 다수의 사람에게 유용하다는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사회성과 도덕성의 기원이나 본질이 똑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사회화 과정을 교육으로 이해하고 교육적 행위를 사회적 행위로 간주하는 입장의 교육학은 자연히 인간의 정신적 측면을 소홀히 다룰 수밖에 없다. 경험을 통해 그 사회적 유용성이 검증될 수 없는 개인의 정신과 인격의 세계는 듀이로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에 기초한 교육학의 관심 밖에 있는 형이상학적 내용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적·인격적 측면을 소홀히 하는 교육학은 일종의 행동과학으로 이해되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의 제작'에 관여하는 사회공학의 방법적 틀 안에서 실천을 추구한다. 따라서 행동주의 교육학이 오늘날 한국의 교육 실천을 주도하게 된 데에는 아마도 듀이의 교육이론에 내재한 사회화로서의 교육 이해가 적잖은 역하고 가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살펴봐야 할 사항은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이 한국에서 제대로 실천되지도 못한 채 단지 이론으로서만 자기주장을 해왔다는 점이다.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이 민주사회의 건설과 민주적 자질을 지닌 국민의 교육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은 물론이고 성적경쟁을 통한 인간성 상실의 교육 현실을 야기하게 된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읻. 물론 한국이 교육이 어떻게 된 데에 듀이나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듀이의 교육이론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교육의 중요한 임무와 기능에 속한다. 그러나 전인적 의미의 교육은 인간이 지닌 신체·심리적 특성, 사회·문화적 영향, 정신적이고 의미를 추구하는 삶, 고유한 개성으로서의 인격적 삶의 차원 조화와 통일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그 가운데에서도 인간의 인격적 특성이 무엇보다도 중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교육을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의 습득, 또는 사회적 가치의 추구와 사회개선의 과정으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배우는 개별적 인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듀이에게서 나타나듯이 "사회당 어떤 가치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고, 우리는 경험의 결과에 비추어 사물을 판단해야 한다"는 교육적 태도는 자유로운 개성으로서의 인간보다는 사회적 효용성과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인간과 교육에 더 큰 비중을 둘 수 있다.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그렇게도 "인성교육"과 "개성교육"이 강조되고 논의 되어도 전혀 바뀌는 것이 없고, 오히려 교육의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교육이 무한경쟁을 통해서라도 사회적 진출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의 습득에 치중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미 수십 년 동안 교육학적 방책을 찾고 노력했어도 그 효과가 미미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교육 현실이 지속되는 데에는 아마도 사회성과 도덕성의 기원이나 본질이 동일하다고 믿는 듀이와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이 그 책임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듀이와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은 한국의 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준 만큼 그 부정적 측면도 지니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의 교육이론에서 추구하듯이 교육은 인간의 자발성 형성에 도움을 주는 과정이다. 그러나 교육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육의 주체인 인간을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즉 그의 역사·문화적 형성 과정, 사회·제도적 조건, 정신과 인격적 특성 들을 다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인간은 고유한 정신적 세계를 소유한 채 문화라는 터전에서 남들과 더불어 사는 인격적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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