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대와 중세의 교육
로마의 교육은 문화사적으로 공화정 시대와 제정 시대로 양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화정 시대에는 교육이 거의 순수하게 로마적이었고, 제정 시대에는 그리스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물론 이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공화정 말기에 이미 그리스 문물이 들어왔으며 그리스적 학교가 나타나기 위해 시작하였다.
비록 그리스에서와 같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퀸틸리아누스 등을 통하여 로마의 교육은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공화정 시대의 교육
- 로마의 전통적인 교육
공화정 시대 초기는 로마교육의 특색이 지배한 시기이다. 이때 로마문화는 조상의 관습과 가부장권 그리고 12 동판법이 근간을 이루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것을 고려해서 자녀를 훈련했다. 로마인의 교육적 이상은 그라 비타스(gravitas)로 요약된다. 그러 비타스는 신, 국가, 가정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인간을 만드는 훈련이었다.
고대 로마인의 생활은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나 스파르타와는 달리 로마에서는 가정이 힘과 법의 중심으로 간주하였고, 교육적 영향력을 크게 지녔다. 가정은 로마 초기의 중요한 교육기관이었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올바른 행위와 사회적 의무 그리고 책임 의식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양육을 담당했으며, 아버지는 지적 교육을 담당했다. 로마인은 지적 교육을 강조하지 않았다. 회계장부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로 쓰기와 셈하기를 공부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이유로 로마에서는 학교 교육이 체계화되지 않았다.
로마에서 교육은 국가의 권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가 공적인 수업을 제공하지 않았다. 교육의 이상은 공적인 생활을 잘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시민, 즉 무기를 다룰 줄 알고 법률과 국가 생활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로마인들은 병역(군무)과 신체적 훈련을 미선성(美善性)의 관점하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 그리스인들과 달랐다. 즉 로마인들은 아름다운 신체보다는 힘이 세고 쓸모 있는 신체를 추구하였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말보다 정당하게 옹호하는 말을 중요시하였다. 그들에게는 실제적인 것이 중요했을 때 미적인 것은 부차적이었다. 교육에서도 미적인 체험과 이론적인 가르침을 실제적인 행동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고대 로마교육은 본질적으로 실제적인 교육으로서 소년들에게는 농사법, 병역, 공적 업무 수행 능력 등을 가르쳤고 소녀들에게는 방적, 직물 법 등을 가르쳤다. 소년들은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을 가정이나 사립 기초학교에서 배웠다.
- 그리스 교육의 도입
기원전 3세기 중엽 이후 그리스 문화와 사상이 도입되었다. 그리스 문화와 사상은 로마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로마 정신과 교육이념이 그리스화 됨으로써 로마적인 교육제도도 그리스의 학교 제도로 재구성되었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가 설립되었고, 기원전 1세기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자유민 남자나 노예에서 해방된 교사들이 7세부터 12세까지의 어린이들에게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쳤다. 후두스(Ludus)라고 불리는 이 초보 학교는 사학으로서 개인의 가정이나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모퉁이 장소, 신전, 기타 공공건물의 현관에서 열렸다. 초보적인 학교 이외에 문법학교가 있었다. 문법학교에서는 그리스에서처럼 언어와 문학을 중요시하였다. 처음에 문법학교는 단지 그리스어 학교였지만, 나중에는 외국어(그리스어) 수업을 강조하는 라틴어 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그리스어를 라틴어처럼 숙달되게 말하고 쓸 줄 아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호머의 작품들이 주 교재였다. 라틴어로 번역된 오디세이를 가지고 라틴어 수업과 문학교육이 이루어졌다.
웅변술이 로마 국가와 법 제도 속에서 점차 중요성을 지니게 됨에 따라 보다 높은 수준의 일반적인 교육을 하는 최종학교로서 수사학 학교가 발달하였다. 수사학 학교에서 수업은 주로 문체학, 작품독서(주로 영웅서사시), 실제적인 웅변 연습 등으로 이루어졌다. 상류계급의 로마인들은 교육의 최종적 단계로 그리스의 아테네, 알렉산드라, 로도스 대학 등에서 공부하였다.
제정시대의 교육
- 학교교육제도의 발달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되면서 로마인은 그리스문화의 지적 활동 및 개인주의를 로마 사회에 채용해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로마인이 그리스 문화를 섭취한 일반적 수단은 그리스의 교육제도를 채용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중심지에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초등학교, 문법학교, 수사학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공화정 시대에 학교는 본질적으로 사립의 형태를 지녔지만, 제정 시대에는 국립과 시립으로 되었다. 황제의 통치권이 확대되면서부터 로마 전역에 학교가 설립되기 위해 시작하였다. 자치 시가 초등교육을 의무로 간주하게 되었다. 황제들이 학교 교육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황제의 후원이 제도화되었다. 황제는 특히 수사학 교사들에게 봉급을 정규적으로 지급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수사학 교육은 일반적으로 국가관리나 장교 등 상류사회 계층의 일원이 되는 길이었다. 수사학 교육의 내용이 공허해지고 부자연스러워졌으며, 더욱 형식화되고 기교적으로 되어갔다. 동시에 7가지 "자유 교과"의 체제도 여러 권으로 된 백과사전적 총서 안에서 고정되어 갔다. 비판적인 텍스트 본문들이 많이 나왔고 도서관이 많이 설립되었으며 대학의 숫자가 늘어났다.
- 기독교의 전파와 교육의 변화
그리스화 된 로마교육은 외견상으로는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의 지배권이 소멸할 때까지 번창하고 세력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로마인의 생활이 문란해지고 정치적으로 독재화되고 초기의 개인주의와 로마인의 강건성이 상실되어 감에 따라서 교육이 전반적으로 그들의 생활과 관련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종래의 교육은 초기 기독교교회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교육으로 서서히 대체되어 갔다. 로마의 교육조직은 야만족이 서구 제국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까지도 존속되었으나 사회적 중요성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이미 3세기부터 로마는 사상적 측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로마는 오리엔트에서 성장한 기독교가 성장하게 되자 교육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독교가 성장하게 되자 교육의 과정에서 새로운 측면이 강조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독자적인 교육기관을 세우지 않았다. 교육은 도덕적 훈련과 구원에 필요한 교리를 학습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기독교 교육은 신성하고 초월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세속적 기관에서는 할 수 없었던 교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