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시대에서 리얼리즘시대까지
시대적 특징
르네상스는 서양 전체 문화의 구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중세의 신 중심 사회와 문화를 탈피해 인간중심 사회와 문화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중세라는 틀을 벗어나 근세라는 새로운 세기로 이행하는 역사적 기점이다. 구조적인 변혁은 인간 삶의 분야에서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 중세 적인 전통과 질서는 이제 그 막강한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중세 사회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종교(기독교)가 지배하였던 사회였다. 르네상스는 위의 삶의 영역들이 종교적 틀에서 벗어나서 독립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기독교 국가가 세속 국가로, 기독교 사회가 세속적인 사회로, 기독교 문화가 세속적인 문화로, 기독교 예술이 세속적인 예술로, 기독교 교육이 세속적 교육으로 탈바꿈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마디로 르네상스는 삶의 모든 분야가 세속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철학적이고 정신사적 관점에서 볼 때 르네상스는 일반적으로 인문주의로 불린다. 인문주의란 고귀한 인간성을 다 측면적으로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정신적 흐름 또는 태도를 말한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말기의 경직된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고 인간 중심적인 새로운 사상을 전개하게 된다. 새로운 사상의 기초를 인문주의자들을 고대 사상과 문화 예술에서 찾으려 했다. 인간성을 참되고도 완전하고도 다 측면적으로 계발하는 것을 고대 그리스인들이 발견하였다고 보고, 고대인들의 작품들은 위대하고 고귀한 인간 이상의 거울로서 모범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즉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새로운 인간 이상과 자유롭고 창조적인 새로운 삶의 형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대의 발견과 함께 인문주의자들은 이제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인간 안에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주변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종교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세속적 관심에서 주변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이점은 인간과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낳게 하였다. 이제 중세 시대에 낯선 개념이었던 "인간"과 "자연"과 "삶"이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인간
중세 사회에서 인간은 신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이해되었고, 신의 인식을 최대 과제로 삼았다. 신의 창조 질서로 해석되었던 우주적 질서는 중세인의 삶과 존재 방식을 규정하는 원칙이었다. 시간상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 한 주일의 시작과 끝, 한 해의 삶, 더 나아가 한평생의 삶에서 종교적 예식과 종교적 질서, 내세적 삶에의 지향이 중심을 이루었다. 공간적으로도 국가 공공 기관과 교회는 그들 삶의 세계 중심에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삶을 지배했다. 황제, 오아, 영주, 귀족, 시민, 농민, 걸인 등 명백히 규정된 사회계층도 신이 규정한 질서로 이해되었다. 계층 질서 속에서 개인의 존재와 삶은 부인되었고, 자유와 자율성과 이성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해를 가져왔다. 신과의 관련성 속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보려는 것이 관심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이다. 즉 신 중심 사회에서 인간중심 사회에로의 변혁이 초래되었다. 인간은 이제 신이 아니라 자연과 문화와의 관련성 속에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고 즐기기 위해 시작했다. 중세 시대의 우주적 질서와 의존관계로 묶던 쇠사슬을 풀고 나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현실적 삶이 부인되던 중세적 전통을 거부하고, 고대 그리스인 삶의 모습에 따라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 문학과 예술에서 발견되는 미적 감각, 감정과 열정이 주요 관심사로 등장했다. 인간은 이제 하나의 주체로 파악되었고 개별적 특성이 강조되었다.
특별히 인문주의자들은 자유와 자율성의 이념을 강조하였다. 중세 사회의 기본제도인 봉건주의와 교회는 중세 우주적인 질서의 수호자였다. 봉건 계층적 질서에 따르고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중세인들의 당연한 삶이었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와 결정은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였던 인문주의자들은 중세적 가치를 더 이 매춘 아르바이트 수용할 수 없었다. 인간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인 결정과 삶이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감을 갖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인간의 이성의 가치를 재발견하였다. 중세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적 관습에 따라 무반 성적으로 생활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하고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른 삶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을 이성(ratio)으로 이해했다. 이성에 따를 때 인간은 바른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고,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인간에 대한 르네상스인들의 탐구는 동시에 인간의 자연성에 대해 새롭고 깊은 이해를 가져오게끔 하였다. 중세 시대의 인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에 따라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인간은 철저히 이분법적인 구도 안에서 이해되었다. 인간은 신의 세계(civitas EDI)와 속세의 세계(civitas Terran) 두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요, 초자연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에 동시에 살고 있는 존재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이 두 가지 대립하는 존재 방식 안에서 인간은 늘 갈등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그리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존재 방식은 분명히 규정되었다. 신적인 특성인 인간의 영혼은 매우 높이 취급되었으나 인간의 자연성과 육체는 죄 된 특성으로 부인되었다. 그러나 탈 기독교화와 세속화 작업 가운데서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을 전혀 새롭게 인식하였다. 그들은 중세의 신학적 이분법적 구도에서 탈피하여 인간을 무전 제하에서 다시 살펴보기 위해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연성인 육체와 감각과 욕망의 영역들을 인간의 정신과 함께 인간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그것은 중세의 금욕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자연적 측면을 새로이 평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중세 사회에서는 인간 존재의 이상적인 측면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 현실적인 면에보다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자연
중세인의 삶은 철저하게 내세 지향적이었다. 현세의 삶은 단순히 순교자의 삶이요, 내세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사람들의 참된 고향은 현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인들은 그러한 내세 주의를 배척하고 현세적이고 속 세 적인 삶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였다. 사람들은 이제 내세의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현세의 삶을 희생하는 대신 현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현세의 즐거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현세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주변의 자연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신학적 관점에서 신이 창조한 피 조 세계로 해석되지 않았다. 또한 죄의 세계화서 극복대상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이 세계는 이제 인간의 세계, 인간 삶의 세계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 정복의 대상으로 파악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조건 없이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주변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시작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고, 1498년 인도로 가는 뱃길이 발견되었다. 이와 더불어 지리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이 급속히 증가했다. 이 세계의 참된 모습을 그 형태와 수에 있어서 명료하게 설명하였던 자연과학적 지식은 이제 잇따른 지리상의 발견과 더불어 참된 것으로 증명되었다. 더불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등에 의해 천체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법칙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지리산과 천체상의 발견은 사물 세계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자연 세계에 대한 관심은 세계관의 확대와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전을 초래했다. 사람들은 이제 종교적인 틀에 예속되고 억압됨이 없이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불어 경험과학적 지식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더 나아가 교육에서도 "사물"과 "실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르네상스시대의 교육
특징
르네상스 시대 교육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고대 그리스 사상과 예술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고대 언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이를 위해 언어 교육이 중요한 교육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특별히 라틴어는 인문주의 교육과정의 가장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대표적인 중등 교육기관이었던 라틴어 학교에서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고대 언어, 그 가운데 특별히 라틴어를 배우는데 보냈다.
둘째, 고대의 발견과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자유교육 이상을 추구하였고, 인간적 교양을 갖춘 자유롭고 자신이 넘치고 고대 언어와 시문학에 능통한 달변가를 키우는 것을 교육의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셋째, 교육 방법 면에서 16세기 인문주의 교육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근세 이전의 중세 교육 방법은 엄한 훈육과 훈련, 비인간적인 취급, 그리고 체벌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점은 근세 인본주의자들에게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각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인간의 자연성을 존중하였던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교육 방법의 핵심 원칙은 어린이와 학생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는 것이었다. 엄한 훈육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고 온화한 교육, 즐겁고 놀이가 강조되는 수업, 어린이의 영혼을 이해하고 그들의 이해 능력을 고려하는 수업을 그들은 강조하였다.
문제점
16세기 인문주의 시대 언어 중심 교육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점을 노출했다. 먼저 고대의 정신과 사상을 받아들이려는 목적으로 고전어와 고전 문학을 강조하였던 인문주의 교육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고대 언어에 집착하고 언어의 형식에만 치우쳐 교육과 도야는 소홀히 하였고, 실제 삶과도 유리된 결과를 낳았다. 인간의 완전성을 추구하고 인간성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매체로서의 언어와 언어교육이 점차 언어를 위한 언어교육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러한 경향은 여러 사람에 의해 언어주의, 형식주의, 현학주의라고 비판받게 되었다.
둘째, 인문주의자들이 추구한 것은 유능한 직업인보다는 뛰어난 예술인과 도야 인이었다. 정신적·언어적 도야, 사교성, 수사학적인 달변이 그러한 인간 이상을 대변하였다. 이러한 점들에서 우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삶의 이상이 귀족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부유한 시민을 중심으로 펼쳐진 르네상스 운동과 인문주의 교육은 새로운 계층구조를 낳았다. 인문주의자들은 라틴어와 현학적인 지식에 흠뻑 빠져 자신들을 의식적으로 평민 계층과 구별하려 하였다. 그들은 고전어를 생활용어로 사용하였고, 모국어를 경시하였으며, 모국어를 사용하는 평민들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 중세 봉건적인 계층사회가 르네상스 시대에 마감되고 그 자리에 교육받은 계층과 교육받지 못한 계층이란 새로운 계층개념이 탄생했다. 평민들이 사용하는 모국어에 대한 경시 풍조는 곧 평민 대중을 위한 국민교육 또는 평민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 인문주의 교육은 지나치게 언어교육에 치우쳐 사물과 관련된 내용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편중된 언어교육에 대한 비판은 이미 당시의 인문주의자들에게서 제기되었다. 영국의 엘리오트(T. Elyot 비베스(J. L. Vive, 1492-1540), 프랑스의 라블레(F. Rabelais, 1494-1553), 라무스(P. Ramus, 1515-1572), 못 떼 새(M. d. Montaigne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한편으로 지나친 언어주의 교육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리얼리즘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교육과정에서 그들은 언어 외에 천문, 지리, 기하, 물리, 음악, 산수, 건축, 광학 등 실제적 사물과 관련이 되면서도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과목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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