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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학/이론가들

만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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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Mannheim

칼 만하임의 생애

  카를 만하임은 189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당시 중동부 유럽의 중심지이던 독일로 유학해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짐 멜과 막스 베버, 알프레드 베버 형제 밑에서 공부한 후 1914년 헝가리로 돌아왔다.

  이 무렵 부다페스트에는 미학자 루카치가 이끄는 '일요서클'이 형성돼 있었고 만하임은 예술사학자 하우즈 등과 함께 이 모임의 열성적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헝가리에 공산 정권이 성립되자 루카치는 인민 교육상으로 참여했지만 이들과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혁명과 반혁명이 거듭되던 당시 유럽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루카치 등과 공유했지만 정치적이기보다 보다 보다 근본적인 지적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만하임은 1919년 다시 독일로 건너가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 활동에 전념했다. 이 기간에 '인식론의 구조 분석' '역사주의' '보수주의적 사고' 등의 저술을 발표하면서 점차 그의 지적 관심의 중심은 철학에서 사회학으로 이동했다. 그가 초기 학문적 관심사를 집대성한 필생의 역작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발표한 것은 1929년이었다.
  만하임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1933년 영국 이주였다. 당시 막 집권한 나치 독일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이 결정은 만하임의 지적 관심 분야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런던정경대(LSE)와 런던대 교육하려 구소. 교수로 활동하면서 사회계획과 사회재건을 위한 사회학 발전에 몰두하였다. 독일 시절 객관적 입장에서 사회진단과 종합화를 추구하던 만하임의 이상적 지식인(지식층)은 이제 현실 속에서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만하임은 이후 자유방임주의와 파시즘적 독재체제를 모두 거부하며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에 서서 활발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펼쳤다. 그가 194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펴낸 '재건기의 인간과 사회' '시대진단' '자유, 권력, 민주적 계획' 등 저술 목록은 그가 독일 시절부터 신호하던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고향에서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바친 열정을 잘 보여준다.

 

 

 

지식사회학의 이론적 배경

  지식사회학은 카를 만하임이 정식화한 바와 같이 「지식의 존대 피구 속성」에 관한 학문이다. 따라서 지식사회학은 왜 어떤 관점이 여러 가지 제 관점 중에서 하필이면 특수한 형식으로, 또한 과거 및 동시대의 다른 형식과는 상이한 형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 인식에서 출발점을 갖는다. 이러한 문제 인식은 사회학 제 문제에 관한 견해 및 입장이 그의 사회적 생활 조건에 의존한다고 하는 「의존성」 (dependency)와 결부되는 것이다. 역으로 상이한 제 조건 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혹은 생활하였던 인간이 왜 상이한 관점을 갖는가 하는 것은 이러한 의존성을 위해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지식 사회학적 문제의식은 멀리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Pret agoras의 유명한 명제 "인간은 모든 사물의 척도이다."는 지식 사회학적 인식에 있어서 상대주의에의 길을 개척한 선구적 주장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Hippias도 사유의 존재적 결정성을 인식하고, 종교는 공포를 통해 도덕과 유순함을 강화하려는 실제적 목표를 위해서 부자와 권력자에 의해 사용된 도구에 불과함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이처럼 소피스트들은 전통적인 윤리적·종교적 세율에 대해 그것은 사회·경제적·정치적 근저(Soci-economic and political roots)를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사회적 규범이나 법, 관념 등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man-made), 따라서 상대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Francis Bacon, John Locke, John Miller, David Hume 등에 의해 계속 추구되어 오다가 18세기말에 이르러서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이데올로기" 개념이 출현하면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체계화되었다. 즉 이데올로기 비판은 인간의 의식이 사회적으로 제약되고 있음을 밝히고 그 의식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데올로기 비판을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에 있어서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자신의 새로운 경제적 기능의 보전과 광대, 그리고 자신의 증대된 경제적 권력의 정치적 권력에로의 전화 등을 추구하고 있는 신흥 부르주아지에 의해 제기된다. 그들은 폐쇄적 중세 사회의 신학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정치적 사회구조의 비판·극복을 목표로 하여 종교의 권위(authority)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폭로한다. 이리하여 부르주아지가 중세적 세계관의 붕괴를 꾀하고 그들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이 등장하게 된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 개념은 인식주체에 있어서 순전히 사회적으로 제약된 메타 이론적(meta theory) 방해 요소인 것으로부터 지배를 위한 은폐와 정당화의 도구로 변한다. 이처럼 처음부터 이데올로기는 정치적인 이해와 결부된 문제였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의 이데올로기는 Mannheim이 지적한 바와 같이 아직 이해심리학적 차원에 그치고 있었다. 즉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거짓말이나 간계(Machination)가 의미한데 지나지 않고, 「사회적으로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전체적 포괄적 의미로는 아직 확대되지 못하였다. 즉 이데올로기는 개인적 표상의 인과적 심리학에 의한 설명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이해심리학적 차원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전체적 차원으로 고양되어 「사회의 필연적인 현상」으로서 파악되게 된 것은 실로 Marx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Marx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사람들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가피한 관계를 맺게 되고, 이 생산관계는 물질적 생산력(force of production)의 일정한 단계에 대응한다. 이 생산관계의 총체가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발생하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유형의 대응되는 실질적 기초, 즉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구성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물질적 생활에서의 생산량식이 사회적 생활의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과정을 경정한다는 것이 Marx의 지식 사회학적인 "존재 결정론"(existential detetminism)이며, Mannheim의 지식사회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존재 구속성(Seinsverbundenheit)의 개념이 파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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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만하임의 사상(지식사회학)

  그의 소년 시대에는 한 세기의 종말과 시작 사이의 전환기며 왕정 하의 국가체제 속에서 유대계 혼형 아이며 중산층의 가정이라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한 사회 내에서의 주도 세력에서 벗어난 중간적 내지는 주변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운명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가정 내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갈등도 어린 만하임에게는 판단의 분열과 혼란을 가져왔을 것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구조적, 시간적, 공간적,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인정되고 일원화된 정통으로부터 벗어난 사회적 위치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회의와 감수성은 전통과 자유를 희구하는 인격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어릴 때 부다페스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다페스트 대학의 철학 파를 지원했다. 이 시기는 세기 초의 전환기의 혼란 시대로서 신칸트학파의 철학과 역사주의 철학 사이에 대립이 되는 때였다. 철학 연구에 있어서도 영원히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순수타당성을 규명하는 것과 역사의식과 동태적 체험에 대하여 선택을 하는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사회개혁의 비판 세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만하임의 신칸트학파 적 연구를 위해서는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19세기가 되던 1921년에 독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가 프라이부르크,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그리고 파리로 전진하면서 연구를 했던 시대는 일차대전 전후에 걸친 것으로서 역시 독일이나 프랑스도 일대 전환기에 처해 있었을 때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의 사조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탐구한다기보다는 역사와 사회에 대해 여하히 종합적 관찰을 해서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지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신칸트학파에서부터 역사주의로 전환한 것도 이 대였다. 말하자면 그의 인식론의 전환기였다.

 

 


  세계대전의 발발로 독일 유학을 끝내고 21세가 되던 1914년 귀국하여 인식론 연구를 계속하면서 문화주의의 모임인라든가 온건 사회학자의 모임인 와 교류하면서 활동을 하였다. 그 후에 가 중심 된 와 교류하면서 활동을 하였다. 그 후에 가 중심 된 을 창설하여 루카치와 더불어 중심 멤버로 활약하면서 강연도 하였다. 이 학원에서 그의 종합적 결실로 가 출판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라는 논문으로서 부다페스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만하임은 정치학이나 사회학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만하임의 그 후의 저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은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래 철학적 오리엔테이션에서 출발한 그는 그 후의 여러 저작이 이 이 기초 위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자급자족의 독립적 단위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다른 사물과의 유기적 관련성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어서 전체의 구조 연관성 속에서 그의 존재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물 세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자주 쓰는 연관성(configuration)의 개념설명 방법은 단순구조에서 더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는 이른바 실증주의적, 원자론적 개념 설명 방법이 아니고 처음부터 복잡하고 더 고차적인 구조를 준거로 해서 더 단순한 것을 설명한다는 전체론적인 판단의 이론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헝가리에도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1918년 11월 헝가리 공산당이 결 설정되고 이듬해 혁명평의회에 의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루카치의 청에 따라 부다페스트 대학 철학 교수가 되었으나 반년도 지나지 못해서 홀 타파에 의한 반혁명의 성공으로 이나를 막론하고 인간해방에 노력하는 모든 이론 및 행동은 탄압받게 되었다. 루카치도 사형을 선고받고 망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혁명에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던 많은 지식인이 홀티 정권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거의 절망 상태임을 알았다. 1920년 마침내 독일로 망명을 하였고 고국과 최종적인 절연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릴 때 불리던 헝가리 이름 칼로 이(Karoly)를 칼로 고친 것도 이때였다.

 

 


  하이델베르크에 정착한 만하임은 베버(A. Weber)나 러데키(E. Lederer)와의 교의를 통해 문화인류학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로 라는 논문을 집필하였는데 이 논문을 쓴 동기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가 가지는 존재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결정론을 비판하고 문화 속에 있는 원래의 내재적 가치를 추출하겠다는 데 있었고, 다른 하나는 역사주의나, 세계 관학이 말하는 가치의 상대화에 대하여 개인의 정신적 체험의 통일성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마르크시즘에 대한 대상 이론의 근거는 역사주의의 주동 세력으로서 새로운 자의식을 가진 지식인에 관한 이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계급 기층에 있는 비합리적 집합적 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탓으로 해서 자기 자신의 입장을 상대화할 수도 없고, 다양한 과점들 속에서 비판적 선택을 통해서 그 본질적인 것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지적 제어의 습관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그는 지식인 자체의 자기 초월이나 다양한 관점에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자유 부동적인 인텔리겐치아의 모체로서의 지식인층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지식인증론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4년부터 1933년까지 8년 간이나 지식사회학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이 기간에 만하임은 나치당의 집권으로 독일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8년간 지식사회학에 관해 슨 책만도 8권이 되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이다. 여기에서 중심 과제는 지식과 사회적 존재에 관한 문제였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사상적 발전은 철학 시대, 문화사회학 시대를 거쳐서 지식사회학의 시대로 이어지며 만년에는 사회체제의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사상의 주류는 지식사회학의 관계 확립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의 사상의 주류는 지식사회학의 관계 확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양의 이론으로 성취될 뿐만 아니라 Scheler의 사상으로부터도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만하임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Marx나 Scheler에 있어서 지식과 사회적 존재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사상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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