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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역사

개화기 교육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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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교육

조선시대의 교육고려시대 교육 읽기삼국시대∽고려시대    흔히 각 시대마다의 교육을 살필 때는 가장 먼저 그 틀, 다시 말해서 학교 제도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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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에서 현대까지의 교육

육영공원 학생들의 행태에서 개화기 교육관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 육영공원의 자원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게 되자 결국에 가서는 수원 학생만을 뽑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수원 학생들이 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수원 학생들이 열심이었는가? 당시 육영공원 학생 중 성적우수자에게는 문과(대과)의 2차 관문인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것은 이미 과거 합격자이거나 관리 신분이었던 자원 학생들에게는 별다른 자극이 되지 못했던 반면, 아직 유학(幼學) 신분이었던 수원 학생들에게는 커다란 혜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 학생들의 학교 교육에 대한 인식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학교 교육을 지위 상승의 수단으로 인식했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민간인이나 선교사들이 설립한 근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조선인 학생들의 배재학당 입학 동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펜젤러는 처음에 영어 사숙(私塾)의 형식으로 문을 열면서 조선 정부에 학생 모집을 의뢰하였는데, 불과 한 달 만에 20명의 학생을 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영어를 배우고 싶으나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에 입학할 수 없었던 부류들이었다. 아펜젤러가 이들에게 "왜 영어를 공부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육영공원이 실패했던 주원인은 여기를 졸업했을 때 주어지는 혜택이 별로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즉 육영공원 졸업이 관직을 보장받는 조건이 된다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경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일류 문벌가 문의 자제들로서 가문의 음덕을 통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육영공원 학생들은 학업에 열의를 보이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해서 육영공원은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이것은 조선시대 성균관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한 셈이었다.

 

 


  한국교육사에서 개화기의 교육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병폐라고 할 수 있는 학력 병 내지 학력주의가 바로 이때부터 싹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나 현상은 역시 오늘날 우리 교육계의 고질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소위 "맹목적 교육열"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할 때, 이 시기의 교육은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이 연출되었는가? 앞서 살핀 1894년의 갑오개혁의 내용은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사회·경제 제도의 개혁 중 신분 차별의 철폐이고, 둘째는 정치제도 개혁 중 관리 임용법의 개정이다. 신분제 철폐는 곧 관리의 조건으로서 더 이상 출신 신분이 문제가 되지 앟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관리 임용법의 개정은 종전의 과거제를 폐지하고 신지식을 시험하는 새로운 관리 이묭법에서는 근대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결정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점차 특정 학교, 즉 관립 근대학교 졸업생을 관리로 임용하게 되면서 여기에 입학하는 것이 출세의 관건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대부터 근대학교에서의 수학 경력, 다시 말해서 학력(學歷)이 사회적으로 중시되게 시작했다.. 특히 이런 경향은 신분제 철폐 조치로 인해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외되어 왔었던 집단까지 가세하게 됨으로써 이제는 한정된 관립학교 입학을 둘러싸고 그야말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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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에 대해 강한 집착 현상이 생기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종전의 과거제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전통사회에서 과거 합격이 갖는 의미는 관직 획득을 통한 사회적 위신의 격상이나 관직에 상응하는 부의 획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합격이 중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오늘날의 학력(學歷)과 유사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는 대과에 합격함으로써 얻게 되는 "급제", 소와 합격해 얻게 되는 "생원"·"진사"는 오늘날의 "대학원 졸"·"대졸" 등의 학력과 비슷한 개념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한 개인의 학력은 학교 졸업이 아니라 과거 합격 여부로 결정되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당시에 최고학부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을 졸업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학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 합격을 통해 얻게 되는 그러한 호칭들은 학식과 동일시되었으며, 학식은 또한 도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이처럼 학식과 도덕성이 동일 선상에서 취급되었던 것은 당시의 서적들이 교훈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할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과거 합격에 강하게 집착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개화기로 들어오면서 전통 시대의 과거 합격과 동일한 의미구조를 지니게 된 것은 바로 학교 졸업이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 합격"이 "학교 졸업"으로 대치되었다. 이제 학교 졸업은 출세와 함께 배운 사람(도덕적인 사람)으로 대접받기 위해 반드시 성취하여야 할 과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전에는 그렇게 과거 합격에 목을 매었던 것처럼, 개화기에는 학교 특히 관립 근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 종전에는 신분제 사회로 인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계층이 한정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개화기에는 신분제가 타파됨으로써 보다 계층이 한정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개화기에는 신분제가 타파됨으로써 보다 많은 국민이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보다 '좋은 학교', 보다 '높은 학력'을 추구하려는 경쟁으로 있어졌으며,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학력주의 사회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하의 교육

미군정기시대의 교육개화기에서 현대까지의 교육 시대적 특징   미군정기 시대는 불과 3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로 이때 현대 한국 교육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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