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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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역사

미군정시대 교육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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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시대의 교육

일제하의 교육개화기에서 현대까지의 교육시대적 특징  조선이 실질적으로 일제의 지배하에 들게 된 적은 1905년을 사조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일본 정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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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에서 현대까지의 교육

 

  당시 우리의 교육개혁을 담당하였던 미군들의 태도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한국민의 은인으로 각인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무 교육제도를 당시 교육 기회를 민심에 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실시하였다는 것과, 교육자치제 실시와 관련하여 당시 미군정 장관이 "이것이 한국 민족에게 보내는 최후의 선물이다"라고 언급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해방 후 우리 국어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국어 교과서를 미군정 장관이 직접 우리 학생들에게 '하사'하는 의식을 거행하려 했던 것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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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처럼 시혜를 베풀 듯이 실시하였던 교육정책은 그 내실 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의무 교육제도의 실시이다. 상식적으로 새로운 제도를 실시할 경우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재정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미군정 당국은 학교 증설과 같은 사업에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았다. 대책 없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교육 기회 확대는 과밀학급이나 2부제 수업을 낳게 되었고, 갑자기 늘어난 학교 졸업생과 한정된 직업 사장과 심한 불균형으로 인해 심각한 취업난이 초래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취업하지 못한 졸업생들이 무작정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보려는 학력(學歷) 가수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학력 인플레'를 가져왔다. 또한 학력 인플레이션은 입시경쟁을 더욱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지나친 입시경쟁은 수많은 교육 문제를 야기했다. 요컨대, 미군정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 때문에 그야말로 백년지대계(白年之大計)여야 할 교육정책을 졸속으로 처리함으로써 우리에게 큰 부담을 안겨 준 셈이 되었다.

 

 

 

  다음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새 교육 운동에 관한 것이다. 한 마디로 당시 새 교육 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우선 당시 학생이나 교사 모두가 일제강점기의 교육으로 인해 획일적 사고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책상은 토의식 수업을 위해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해 놓고 실제 수업은 일제 강점기 때와 똑같은 강의식으로 하는 것이 당시 교실의 일반적인 모습들이었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중학교 입시 때문이었다. 입시를 위해서는 역시 강의식 교육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까닭에, 토론이 중심이 되었던 사교육은 일선 학교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교육을 하면 실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학부모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힘에 따라 사교육은 설 곳을 잃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교육

미군정기시대의 교육개화기에서 현대까지의 교육 시대적 특징   미군정기 시대는 불과 3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로 이때 현대 한국 교육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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