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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에서 현대까지의 교육
시대적 특징
미군정기 시대는 불과 3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로 이때 현대 한국 교육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육사상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을 굴복시킨 미·소 연합군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을 경계로 미군은 남한에 소련은 북한에 들어와 각각 군정을 실시하였다. 처음에 미군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점령군처럼 위협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미군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는 등 한국민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기까지 하였다.
당시 미군정의 기본목적은 소련에 대한 견제를 위해 남한을 미국과 동일한 사회질서를 갖춘 민주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매사에 한국인들의 협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교육 분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남한의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서 반공 이념이 투철하고 민주주의적 성향을 가진 한국인 교육 인사들을 발탁하였는데, 이들 인사들은 당시 학무국 직원이나 한국 교육위원회 및 조선 교육 심의와 위원으로 있으면서 우리 교육의 초석 마련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미군정시대의 교육 시책
초기의 미군정 당국은 혼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제강점기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였는데 교육제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 후 여유를 찾은 미군정청은 남한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든다는 방침에 따라 한국인 개화기의 교육개혁에 필적할 만큼의 엄청난 개혁이었다. 이 대 추진된 교육개혁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육이념의 제정: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교육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바로 교육이념의 제정이었다. 이 문제는 당시 조선 교육심의회의 교육이념 분과위원회에서 다루었으며, 그 활동의 결과로써 다음과 같은 교육이념이 제정되었다.
홍익인간의 건국 이상에 기(基)하여 인격이 완전하고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주국가의 공민을 양성함을 교육의 근본이념으로 함.
이처럼 당시 교육이념의 핵심 문구는 "민주국가의 공민"이었으며, 그것의 토대는 "홍익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홍익인간의 도입은 당시 이 작업에 관여하였던 한국인 교육 인사들의 한국인 교육 인사들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학 제의 도입: 먼저 복선형 학제를 단선형으로 바꿈으로써, 종전에 보통 교육과 실업교육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어 빈부에 따라 진학하는 학교 계통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제는 모든 국민들이 일원적인 학교 제도 안에서 진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가지의 수업연한을 6-3-3-4 제로 전환하였는데, 이 학제의 골자는 종전에 4년제였던 중등학교를 6년 제로 하면서 이를 초급중학교 3년과 고급중학교 3년으로 나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찬반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이와 같은 6-3-3-4 학제로 굳어지게 된 것은 이것이 미국의 학제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의무교육에의 실시: 미군정 당국이 남한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든다는 계획은 국민들에 대해 최소한의 교육이 이루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과, 전통적으로 강한 진학 열을 지녔던 한국민들의 교육 기회 확대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당시 의무교육에의 실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교육심의회에서는 1946년 9월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하기로 가결하였으며, 그 후 문교부는 국민들의 진학을 꾸준히 권장한 결과 1948년에는 전체 취학연령 아동 중 75%를 초등학교로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이 밖에도 대규모의 교원 양성과 재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일제강점기의 교과서 대신 새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또한 취학 시기를 놓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인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군정 말기에는 교육자치제의 실시계획을 담은 군정 법령을 공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민간 차원에서는 교육의 민주화가 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교육의 현장에서도 명실상부하게 민주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육 운동을 펴나갔다. 이것이 바로 "사교육운동"이었다. "새 교육"이란 한마디로 아동 중심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새 교육 운동은 그 후 군정 당국에서 관여하게 되었는데, 군정 당국은 특히 교사들에 대한 재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당시에 사교육을 실시했던 일선 학교에서는 아동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교수법을 실시한다는 취지로, 종전의 강의식 수업을 지양하고 분단 조직을 통한 아동들의 발표와 토론이 주가 되는 수업을 권장하였으나 실제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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