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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표현대로라면 죽을 일도 참 많다.
'배고파 죽겠다' 이 말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을 위한 비명쯤으로 치자, 그러나 할 일 없이 무료한 경우에도 우리는 '심심해서 죽겠다'는 표현을 한다. 배고픔과 같은 생리적 욕구에 비한다면, 무료를 풀 수 있는 것은 고차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죽겠다는 표현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너무 심심해도 죽기 때문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탐구하고 남과 교류하기 위해 원한다. 탐구하려는 욕구는 독서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과학적인 조작을 해본다든가, 그림이나 조작, 그리고 기계나 설비의 작동을 공부하거나 또는 최근의 연극이나 영화를 보려고 하는 욕망과 같은 그러한 활동으로 표현된다. 흔히 사람들은 수수께끼 놀이를 하거나 장기·바둑·화투·카드 등 전략이 필요한 놀이를 하는 것과 같이 이런저런 불필요한 지적 활동을 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흥미나 자극을 박탈당하면 점차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우리는 '심심해서 죽겠다'는 표현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벤 스톤'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는 대학생들에게 작고 방음이 잘 되어 있는 방안의 침대 위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으면 일당으로 $20을 준다고 했다. 물론 음악도 독서도 차단했다. 피실험자들은 시각적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투명의 보호안경을 썼으며, 촉각적 자극을 감소시키기 위해 장갑을 끼게 했다. 피험자들은 대개 4시간에서 8시간 정도는 잘 견뎌냈으나, 점차 권태롭고, 조처하고, 불안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손가락을 같이 부닥치거나 근육을 잡아당기거나 하여 자기 스스로를 자극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감각박탈 상태가 하루·이틀 지남에 따라 많은 피험자는 환각을 경험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사람은 너무 심심하면 불행을 느끼게 되고, 이 기간이 길어지면 결국 신체적·정신적인 이상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이 연구는 시사해 준다.
탑골공원에 나가 있는 수백 명의 노인들은 한없이 계속되는 무료를 달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점점 많아지는 아무 할 일 없는 노인들을 위한 소일거리를 우리가 다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