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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

교육토리 2024. 11. 2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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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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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Weber

베버의 생애

  막스 베버는 1864년 4월 21일 튜링겐 지방(Thuringia) 에르푸르트(Erfurt)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식교육을 받은 법률가이며, 서부 독일에서 직물업을 경영하는 가정의 출신이었다. 1869년, 베버 일가는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아버지 베타는 정치가로서 성공하고, 베를린 사회, 프로이센 의회, 그리고 새 독일 제국의회에서 활약하였다. 아버지 집에서 소년 베버는 딜타이·몸엔·몸엔·쥴리 던 슈미트·지밸·트라이 취네·프리드리히 카프 등과 같이 그 시대의 독일의 역사·정치·경제·사회학의 분야에서 전문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 알게 되었으며,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게 되었다.

  그의 부인 마리안네와 결혼한 후 베버는 베를린 대학에서 젊은 학자로서 성공하였다. 유명한 경제학(상법) 교수의 병으로 인해 베버는 대신해서 강의를 주에 19시간씩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국가 사법시험에 관여하면서도 자신의 연구를 쉬지 않았다. 1984년 가을 그는 프라이부르크대학의 경제학 정교수로 취임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일을 담당하고 밤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하였다. 마리안네가 억지로 좀 쉬게 하려고 하면 그는 "1시까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는 교수가 될 자격이 없어"라고 소리치곤 하였다.


  1896년 베버는 유능한 지도자의 한 사람인 저명한 크리스의 은퇴에 뒤이어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베버는 은퇴했으나 하이델베르크의 지적인 사교생활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이전의 스승들과 그 외 여러 인사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중에서 종교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는 베버의 최대 친구이며 지적인 반려자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3년 반에 걸친 중병을 앓은 후 1902년에 베버는 하이델베르크에 돌아가 가벼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수년간의 지성 상실을 메꾸려는 듯이 서서히 학술잡지와 다방면에 걸친 막대한 문헌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결과 그는 수년간의 지성 상실을 메꾸려는 듯이 서서히 학술잡지와 다방면에 걸친 막대한 문헌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결과 그는 4년 반이 지난 후에야 서평을 쓸 수 있었으며, 이 시기 이후로 베버에게는 저술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는 사회·경제적인 문제·사회과학에 있어서의 객관성을 다룬 논문들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적인」의 제1부를 발표했다. 그리고 8월에 베버 부부는 미국을 향해 출발했다.

 


  막스베버의 미국에 대한 반응은 열성적이면서도 공정한 것이었다. 신대륙에 대한 편견을 가진 동료가 겨우 하루 뉴욕에 체재한 후 미국 풍물을 깎아내리기 위해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 없이 화를 냈다. 베버는 신세계를 잘 알고 난 후, 판단하는 능력을 잃지 않으면서 호감을 가지고 미국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는 맨해튼의 출·퇴근길의 풍경에 큰 매력을 느꼈다. 브루클린 다리의 한가운데 서서 대중교통과 시끄러운 인파의 파노라마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시카고로 갔는데 이 도시는 베버에게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무법과 폭력, 고급 주택 구역과 빈민굴의 날카로운 댖, 도살장의 증기, 먼지, 피, 가죽 그리고 인종들의 혼합 등을 유심히 보았다.

  미국 여행 중 베버는 노동문제, 이민 문제, 행정제도의 문제 등 자본주의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 아마 베버에게는 미국이 새로운 사회의 모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이 최대한의 자유를 얻었으며, 또한 그들의 본을 따라 비종교적·시킨 적(자발적 단체)과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베버의 미국 견문의 초점은 민주국가에서 관료제의 역할에 집중되었다. 그는 와 단순한 의견의 혼잡만을 보이는 상황을 방지하려면 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보스들에 의한 정치란 직업적인 전문가에 의한, 즉 규율 있는 정당조직과 같은 정치의 관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보스들에 의한 정치의 전체적인 진행 방향은 합리적인 능률의 향상과 그것에 따르는 관료 기구, 즉 정당·지방자치제·연방제 등의 발달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미국의 견문을 통해서 베버는 민주주의는 관료제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데, 왜냐하면 관료제는 전문교육, 자격시험 합격증, 직위의 보장에 의하여 일반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관리층을 발생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미국에서 독일에 돌아오자 곧 하이델베르크에서 저술에 착수하여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적인」의 제2부를 완성했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를 근대적인 직업 문명의 기초-근대경제를 이루는 정신적인 구성요소로 본다."라는 의견을 말하게 된다. 저명한 사회 과학자들이 베버가 교단에 복귀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조금 더 저술에만 전념하고 싶어 했다. 1908년 베버는 사회학회 창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곳을 통하여 그는 사회과학 관계의 백과전서 시리즈를 편집하고 발행했으며, 그 자진의 저서인 「경제와 사회」도 출판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베버는 50세였다. 그는 예비군의 일원으로 군기 및 경제 담당 장교로서 대위 임명을 받아 하이델베르크 지구의 9개 병원의 설립과 운영을 담당했다. 또한 이 지위에 있으면서 그는 자기 사회학의 중심 개념이 된 관료제를 내부에서부터 경험했다. 그는 전후의 새로운 체제하에서 어떠한 정치적 지위에도 취임하는 것을 사양하였다. 여러 대학으로부터 초청이 잇달았으나 그는 한사코 거부하다가 결국 뮌헨대학에 부임했다. 여기에서 강의가 그의 마지막 강의였다. 이 강의는 학생의 요청으로 정리되어 「일반 경제사」로 출판되었다. 1920년에 그는 병이 들었고 의사의 진단 결과 고질의 폐렴이라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사회학·역사학·경제학·종교학 등 폭넓은 사회과학 분야의 천재였던 베버는 1920년 6월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베버의 학문적 배경

  독일 사회 사상가 막스 베버는 카를 마르크스 및 에밀 뒤를 껨 등과 함께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간주한다. 그러나 베버는 비단 사회학만 아니라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경제학, 동양학, 과학철학, 조직론 등 현대 인문 사회과학 전반의 발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학자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보편 천재'라고 불리기도 한다.


  베버의 이렇게 다양한 연구 활동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인식 목표는 자본주의적 근대사회의 역사적 기원과 그 사회학적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특히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가 왜 하필, 14~15세기까지만 해도 오히려 후진 문명권에 속했던 서유럽이라는 변방에서 최초로 발현했느냐는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베버는 그의 짧은 학문적 생애 동안 서양과 동양의 역사 전반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지속해서 확대하고 심화시켜 나갔다. 그는 섭렵한 시대와 문화권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고대 이스라엘, 헬레니즘, 로마제국, 중세 유럽, 그리고 중국과 인도를 포괄한다. 베버는 이러한 방대한 작업을 통해 한편으로는 왜 하필 서유럽에서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현했느냐는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들을 밝혀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적 근대성 일반이 가진 보편적 '사회학적' 속성들을 규명했다. 베버가 이 과정에서 얻은 일련의 통찰들은 근대성에 관한 현대 사회과학적 담론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니체가 서구의 근대문명에 대해 내리는 진단은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베버의 근대진단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천구백 년간 서구 정신을 이끌어 왔던, 기독교적 절대-유일신에 바탕으로 한 종교적 세계상은 '신의 사망'과 함께 와해하였다는 것이 이 진단의 내용이다. 이 와해 과정이 서구인들에게 가져다준 정신적 충격은 우리 동양인들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서구 정신은 천 년이 넘도록 기독교적 유일신이라는 형태로 단 하나의 절대 진리, 단 하나의 절대 권위, 단 하나의 절대 의미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해 왔는바, 따라서 이 절대 신의 상실은 이들에게는 기실 모든 것의 상실로 다가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의 사망을 선포한 니체가 도달한 곳이 '허무주의'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베버 자신은 이런 근대적 상황을, 모든 것이 "이제 단지 '존재'하고 '일어나기만' 할 뿐, 더 이상 무언가를 '의미하게' 되지는" 않는 세계라고 표현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과 세계의 존재 의미를 해석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초월적-절대적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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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러한 절대기준의 상실, 즉 궁극적 의미와 가치의 상실은 역으로 궁극적 의미해방, 가치해방을 뜻한다. 따라서 베버가 가장 중요한 자격요건으로 지적하고 요구하는 것은, 첫째 이 '허무'의 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둘째 이 밤을 밝힐 의미-빛과 추위를 녹일 가지-'열'을 스스로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이다. 즉 근대의 시작과 함께 모두를 차별 없이 비춰주고, 또 모두가 저항 없이 수용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양은 이제 더 이상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 된다. 적어도 우리가 의미해방과 가치해방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 대신 이제 우리 각자가 의미와 가치의 소(小) 태양이 되어야 한다. 이제 가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선택하고, 결단하고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베버는 자신의 학문 연구 전반에 걸쳐서 인간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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