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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철학

삼국시대의 교육

교육토리 2024. 9. 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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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교육사와 한국교육사 2

왜 교육사인가?  한국의 교육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눈을 정립시키기 위하여 한국교육사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교육이 수행해야 할 가장 일차적이고 확고한 실천적 과제란 시간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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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고려시대의 교육

 

시대적 특징

 

 종전의 부족국 각 들을 병합함으로써 출발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보다 광범위한 고대국가 체제로의 변신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법령을 반포하였으며, 각 부족들이 갖고 있었던 서로 다른 사상들을 극복하고 부족들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불교를 수용하였다. 그런데 역사서의 편찬이나 법령의 반포는 국민들의 문해(文解) 능력이 있을 때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학교 및 이와 유사한 교육제도를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삼국시대의 특징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세력 균형을 이룬 정립(鼎立) 상태로서 당시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삼국의 교육에는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청소년 수양단체의 존재와 교육 내용에서의 문무(文武) 균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삼국시대는 한국 교육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교육의 시대로 남게 된다.

 

 


  삼국의 교육에서는 보편성과 함께 그들 나름의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교육이 시대적·사회적 산물임을 감안할 때 이는 곧 삼국의 상황이 서로 비슷하면서도 달랐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그 시대가 달랐던 만큼 특유의 교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시대의 교육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알 도리가 없다. 여기서는 편의상 우리 교육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삼국시대 교육부터 다루기로 한다. 

삼국의 교육
고구려의 교육
  • 태학

  태학(太學)은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되었으며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라는 교육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기록에는 단지 언제 태학을 설립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다. 태학은 중국 동진(東晉)의 학교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진에서는 일찍부터 태학을 운영하고 있었고, 또한 양국이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고구려의 태학은 동진의 것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동진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태학의 입학 대상 역시 귀족 자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들이 신분상 장차 관리가 될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태학은 관리양성 기관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고구려에 있었던 서적들의 종류로 미루어 볼 때 태학에서는 유교 경전, 역사서, 한자 사전, 문학서 등을 교재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태학의 교관 명칭은 "박사"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중국의 고구려 관련 사료에서도 "태학박사"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태학과 함께 '국자학'이라는 학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의 동진이 385년에 국자학을 설립함으로써 태학·국자학의 양학(兩學) 제도를 운용했었으며, 그 후에 고구려가 관계한 중국의 남·북조 역시 국자학 제도가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중국에서 641년에 편찬된 《한원(翰苑)》이란 책의 '고려기(高麗記)' 중에 "국자박사·태학박사가 있어···"라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항들을 고려할 때 고구려에는 태학 외에도 국자학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 경당

  고구려에는 "경당(扃當)"이라는 또 하나의 교육 공간이 존재하였다. 경당의 성격은 다음의 기록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풍속이 서적을 좋아하여, 누추한 문에 땔나무를 해서 사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네거리에 커다란 집을 짓고 이를 일컬어 경당이라 하는데, 자제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밤낮으로 여기서 독서와 활쏘기를 한다.
  사람들은 배우기 위해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에서 땔나무를 팔아 살아가는 집에 이르기까지도 부지런히 배우는 것에 힘쓰며, 네거리 옆에 위엄을 갖춘 집을 지어 경당이라고 부르고, 자제들 가운데 미혼인 자들이 무리 지어 머물면서 경서를 외우고 활쏘기를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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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은 지방에 설립된 학교로서 고구려에는 전국 곳곳에 경당이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당 교육의 대상이 누구였는가 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이 기록들이 말하는 "미혼자"는 단순히 결혼하지 않을 자라기보다는 청소년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신분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경우 경다운 평민들만을 대상을 하는 기관이었다면 지방의 귀족들을 대상으로 했던 교육기관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점은 신라의 화랑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밤낮으로 독서를 했다는 사람들이 모두 평민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 결국 위의 기록에서 "가난한 ··· 집에 이르기까지"라는 문구는 경당 입학생의 신분적 하한선을 강조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의 경당은 귀족 및 평민 모두를 수용했던 지방 교육기관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교육 내용으로 볼 때 경당은 관학(官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독서와 활쏘기, 다시 말해서 문무 병행의 교육 내용은 당시 고구려가 처해 있었던 시대적 상황, 즉 중국·백제·신라와 대치하고 있으므로 해서 언제 있을지 모를 전시(戰時)에 대비하여야만 하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이처럼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작업은 국가에서 해야 하고 또 국가가 주도 하였을 때 가능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경당은 당연히 관학으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들을 고려할 때 경당은 신라의 화랑도와 대단히 유사한 집단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둘은 국가의 위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귀족과 평민을 통괄하여 문무의 균형을 중시하는 관 주도의 청소년 생활공동체였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한 시대의 교육이란 그 시대적 상황의 산물임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교육

 

  백제의 교육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료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그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나마 백제 교육의 모습을 추측게 하는 단서는 중국의 사료에 들어 있다. 물론 이런 측면은 고구려 교육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사료에 고구려·백제 교육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이유는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신라 위주로 역사를 기술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백제에 학교가 존재했음을 알려 주는 단서로서 "박사"라는 호칭이 있다. 박사는 원래 중국에서 유교 경전의 연구와 교육을 담당했던 학관(學官)의 일종인데, 학관이 있었다는 것은 곧 학교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백제의 기록에서 박사라는 호칭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에 학교가 존재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박사라는 호칭은 백제의 교육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박사는 곧 5경 박사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백제에서 5경을 주 교육 내용으로 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일본에 초빙되어 건너간 아직기가 《일본서기》에 "경전을 해독할 줄 아는 자"로 기록된 것을 보아도 백제에서는 5경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올 때 《논어》와 《천자문》을 휴대했었다는 기록과 《구당서》 '백제전'에 "그 나라 서적 가운데는 5경 및 자(子)·사(史)가 있다"는 등의 기록을 볼 때, 백제의 교육 내용으로는 5경 이외에도 천자문, 사상서, 사서(史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백젲의 교육 내용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중국 《북주서(北周書)》 '백제전'의 "(백제인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했으며, 아울러 고서(古書)나 사서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 가운데 뛰어난 자는 글짓기에도 정통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이것은 곧 백제가 서적 중심의 문 교육뿐만 아니라 무(武)교육도 중시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백제가 무술 교육을 중시했던 이유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와의 대치 상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백제에서는 의(醫)·역(易)·역(曆) 등을 담당하는 전업(專業) 박사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에 어느 정도 잡학 교육이 실시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처럼 백제에서 문·무·잡학 교육이 이뤄졌다는 것은 곧 당시에 어떤 식으로든 학교 내지 교육제도가 존재했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것들은 고구려의 태학처럼 중국식의 학교였을 수도 있고 혹은 경당이나 화랑도 같은 청소년 수양단체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것들의 명칭이 무엇이고 특징이 어떠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학교 내지 교육제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신라의 교육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학교설립이 늦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이 두 나라에 비해 교육상의 발달이 늦었다고는 볼 수 없다. 신라에는 일찍부터 학교가 아닌 신라 고유의 교육제도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바로 화랑도였다. 화랑도가 신라의 기간 교육제도라고 하는 것은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화랑도)로부터 나왔으며,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이처럼 화랑도는 신라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양성해 냈던 제도로서 당시 중국식의 학교 제도와는 사뭇 다른 형식이었다.

  화랑도의 전신은 원화 제도였다. 이 제도의 특징은 알고명의 지도자가 여자였다는 것인데 가장 잘 알려진 원화로는 "남모"와 순정"을 들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준장이 남모를 시기한 나머지 살해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데, 그 일로 순정 역시 사형을 당하게 되고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여자 대신에 남자를 우두머리로 삼는 제도로 전환하게 되며 그들이 바로 화랑이었고 이들이 이끄는 집단이 바로 화랑도였다.
  화랑도는 본래 자생집단이었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청소년집단이 있었는데, 이 집단은 특정한 사람이 모범인지 되어 그를 중심으로 행실을 모방하게 하는 수양단체의 성격을 띠었다. 초기의 화랑도 간에는 서로 연계성이 없었으며, 진흥왕 37년(576)에 와서야 이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화하였다. 그 조직은 맨 위에 국선(國仙) 화랑 그리고 그 밑에 화랑도들은 두었고, 각 화랑도에서는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화랑이 수백 또는 수천 명의 낭도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당시에 화랑이 될 수 있는 조건은 ① 수려한 외모 ②덕성 ③귀족 신분 ④14~18세 등이었다. 특히 화랑의 요건으로서 귀족 신분이 요구되었던 것은 평민이 낭도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신분이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의 교육 내용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혹은 서로 도의를 닦고, 혹은 서로 노래와 음악을 즐기고 산수를 돌며 놀았는데 아무리 먼 곳이라고 해도 가지 않은 데가 없었다. 이를 통해 그 사람됨이 나쁜지 좋은지를 알아내어 좋은 사람을 택해서 조정에 친서하게 되었다.
  먼저 도의 교육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도의 교육의 핵심은 바로 세속오계(世俗五戒)였다. 이 세속오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사군이충(事君以忠) : 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겨라.
  • 사친이효(事親以孝) : 부모를 효로써 섬겨라.
  • 교유이신(交友以信) : 친구를 신의로써 사귀라.
  • 임전무퇴(臨戰無退) : 전쟁할 때는 물러서지 말아라.
  • 살생유택(殺生有澤) : 살생은 가려서 하라

 

 

 

  여기에서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유임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덕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은 불교적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중 주목할 만한 덕목은 임전무퇴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던 "불국토(佛國土)" 사상을 알 필요가 있었다. 불국토란 원래 부처가 거처하는 땅으로 더할 수 없이 좋은 자연환경으로 되어 있으며, 자비가 충만하여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불교의 이상 국가를 뜻한다. 그런데 당시의 신라 국민들은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인들에게 있어서 국토는 신성하고 존엄한 존재였다. 따라서 국토에 대한 외적의 침략은 자신들의 진리 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이 경우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국토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처럼 "임전무퇴"는 바로 불국토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살생유택" 또한 불국토사상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덕목은 유교의 "인(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거나 수태한 소를 잡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만일 외적과의 전쟁을 벌일 경우 어쩔 수 없이 적을 죽여야 하므로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계율이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랑도의 교육 내용은 이와 같은 도의 교육과 함께 음악을 통한 상호 간 유대 의식 강화, 국토 순례를 통한 심신 수양 등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국토 순례는 화랑들이 자신들 땅이 신성한 불국토임을 확인시킴으로써 애국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 교육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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