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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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역사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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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의 학교교육3

서원 일반적으로 서원이라 하면 16세기 이후에 제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학(私學)을 의미한다. 고려말과 조선 초에도 "서원"이라는 명칭의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이것은 후진 교육에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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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시대의 통치 이념이 어떤 것이었고, 그것에 기초한 교육이념의 내용은 무엇이며, 교육제도는 어떻게 실행되었는가를 살폇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에게 조선시대 교육에 대해서 피상적인 이해만 가져다줄 뿐이다. 실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은 이런 껍데기 사실이 아니라 당시의 실제적인 교육이 모습이다. 그동안 우리가 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이유는 지금까지 교육사 서술이 귀납적 방법보다는 연역적 방법에 의존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시대 교육에 대한 설명은 주로 당시 학교가 통치 이념인 성리학 이념을 구현하려는 노력의 결정체였으며, 이러한 학교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만큼 교육은 정상적으로 잘 운영되었다고 하는 식이었다. 여기에서는 당시 교육 수요자들이 왜 교육받으려 했고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 사실(史實)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검토함으로써 당시의 교육 현실이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귀납적 접근이 요구된다. 이 귀납적 방식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동안 가려졌던 당시 교육의 실상을 규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공부 목적: 과거 합격

 

  우리는 우선 조선시대 사람들이 교육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왜 교육을 받으려 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조금만 문자를 알면 곧 과거시험 볼 마음만 가진다."라는 말은 그러한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당시에 글을 배운다는 것은 곧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글을 열심히 공부하더라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유생은 애를 써가며 부지런히 경서를 연구하더라도 혹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시골에 폐기되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치게 되니···

 

 

  그렇다면 왜 과거 합격이 중요했는가? 흔히 과거급제는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과연 당시에 실제로 그러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당시에 가장 중시되었던 문과(대과)에 급제한다고 하더라도 받게 되는 쌀이나 기타 곡물은 대부분이 양반 출신이었던 이들에게 있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사대부들의 녹봉이 본래 박하고 적은데···"라는 당시의 인식처럼 과거 합격은 부와 다소 거리가 있었다.
  결국 과거에 급제하기를 갈망했던 보다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중 하나는 바로 양반 신분의 유지였다. 당시 과거 응시자들은 대부분 양반이었다. 일반 양인들의 경우 법으로 과거 응시가 금지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 준비를 위한 그들의 경제적 능력이나 혹은 응시 절차에서 요구되는 관할 관리의 신원보증서 제출 등과 같은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이들이 과거시험을 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당시 양반들이 과거에 매달렸던 이유는 양반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사조(四祖), 즉 부·조·증조의 3대와 외조(外祖)에 9품 이상의 문·무 관리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관직을 얻지 못하게 되면 양반에서 중인(中人) 또는 양인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관직에 도달하는 주요 통로인 과거가 중시되지 앟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과거에 합격하게 되면 "유학(幼學)"이나 "학생"이라는 호칭을 면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들 호칭은 모두 무관직 자를 의미하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것으로서, 생전에는 "유학"으로 불리다가 사후에는 "학생"으로 바뀌었다. 하여튼 이런 호칭은 특히 소와 합격해 생원이나 진사만 되어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밖에 당시에는 학식의 정도가 중요시되었는데 한 개인의 학식은 곧 그 사람의 도덕성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식의 판단 기준은 학교 졸업이 아니라 바로 과거 합격 여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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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당시 양반들에게 과거 합격은 그들의 사회적 가문 적·개인적 차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결국 과거 합격은 그들의 사회적 가치체계에서 가장 상위를 차지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교육은 주로 과거 합격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그 밖의 의미는 극소화되었다. 다시 말해 과거에 합격하게 되면 다음의 인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더 이상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문과로 졸업한 자가 거의 배움을 이로움과 본봉의 수단으로 삼아,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학업을 버리니...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 2

2024.09.04 - [교육의 역사] -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 1조선시대의 교육 공부 방법: 시험 문화  교육을 수단으로 인식하게 될 때 그것의 선택 기준은 당연히 효율성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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