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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역사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 2

교육토리 2024. 9. 3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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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 1

2024.09.12 - [교육의 역사] - 조선시대의 학교교육3조선시대의 교육 우리는 조선시대의 통치 이념이 어떤 것이었고, 그것에 기초한 교육이념의 내용은 무엇이며, 교육제도는 어떻게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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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방법: 시험 문화

  교육을 수단으로 인식하게 될 때 그것의 선택 기준은 당연히 효율성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시대에는 과거 합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교육을 선택할 것인 자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 교육의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내용이 어떤 것인지 우선 당시 교육의 실상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부터 살펴보자.

 

 

  성균관과 사학(四學)에 모여 학업을 연마하지 아니하고 서울 및 지방의 유생이 사사로이 집에서 배우고 있어···

 

  이처럼 당시에는 학생들이 성균관과 사부학당 같은 관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기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성균관을 포함한 당시 관학들은 부진을 면치 못했는데 그것은 바로 재학생 숫자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성균관의 경우 정원이 200명인데도 불구하고 재학생 수는 대체로 수십 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기숙사에 상주하면서 공부하는 학생은 그것의 반도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는 한두 명에 불과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학생이 없기는 사학(四學) 역시 매한가지였다. 학당마다 저우언라이 100명이었으나. 학생은 거의 없어서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사학의 기숙사가 모두 하나같이 퇴락하여서 무성한 풀만 가득하여 마치 빈 절간과 같으니···"라고 한 것은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앞서 살핀 바처럼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학의 정원이 각 5명씩으로 축소되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관학교육의 부진은 전반적인 추세로서, 이 점에 있어서는 향교 또한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향교의 경우는 성균관이나 사학과는 달리 그 재학생 숫자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향교 재학생들은 군역(軍役)을 모면하기 위해 들어온 양인 출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육 실수요자들은 향교를 기피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이 관학을 기피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각 학교마다 그 이유가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공통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교관의 자질 부족이었다.

 

 

  (성균관 교사는) 거의 합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늙고 병든 사람이 아니면 거의 다 인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국가의 최고학부인 성균관의 교관 사정이 이러했다면 사학이나 향교의 교관은 어떠했을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당시 관학에는 교관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설사 교관이 있다 하더라도 사기 저하와 자질 부족으로 정상적인 교육이 이뤄질 수가 없었다. 교관 문제와 함께 관학 교육을 기피하게 한 또 다른 이유는 숙식 조건이 대단히 열악했었다는 것이다. 성균관에서조차 음식이 먹기 힘들 정도로 형편없었으며 기숙사 시설 또한 거처하기에 대단히 불편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성균관 학생 중에는 병을 얻어 가끔 죽어 나가는 경우까지 있었다. 당시에 관학에서 과거 준비를 하려는 학생들이 거의였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 공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교육이었다.
  당시 사교육의 형태는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교사에게 지도를 받는, 그러니까 오늘날의 과외수업과 같은 유형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독학이었다. 물론, 독학의 경우도 어느 정도 교사의 지도를 받아야만 과거 응시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특히 전자와 같은 사교육 방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로서 관학 교육의 열악한 조건을 꼽을 수 있지만, 이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학생들 간의 경쟁심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시험이란 어차피 일정한 등수 안에 들어야만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한 발 앞서 갈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관학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만일 학생들이 이처럼 정상적인 관학 교육을 똑같이 받을 경우 관학 교육 자체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조건이 되는 셈이고, 이런 조건에서는 누구도 과거 합격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대안 즉 사교육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시험이 존재하는 한 사교육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독학이라는 방법 역시 보편적인 과거 준비 방법이었는데, 독학은 주로 자기 집이나 혹은 절간에서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독학을 조장한 중요한 원인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초집(抄集)이라는 것이었다. 초집은 일종의 예상 문제집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는 이 초집이 대단히 성행하였다. 초집을 빼놓고서는 조선시대 교육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거였다. 그만큼 초집은 조선시대 교육의 모든 특징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었다. 우선 사료를 통해 초집의 존재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온 나라 자제들이···초 집만을 좋은 수단처럼 여겨···비록 금하는 법이 있을지라도 이제는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학생들에게 초 집은 과거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 문제 및 답안을 모아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과거 준비가 가능하다고 보고 독학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그런데 초 집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아 장기간에 걸쳐 준비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과거 시험이 임박해서 준비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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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3년마다 과거시험을 실시한 법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글을 배우는 학생들이 미리 시험 볼 시기를 알고서 한가히 놀고 공부를 폐하고 있다가, 임시로 주워 모두 가지고 요행이나 바라면서 일찍부터 상시로 학교에서 학업을 익히려는 뜻이 없게 되오니···

 이처럼 초 집은 학생들로 하여금 관학 교육을 거하게 했으며, 학업 태만 풍조를 가져왔다. 한편 국가의 입장에서는 과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백성들의 학구열을 도모하려 했던 의도는 커다란 차질을 맞게 되었던 셈이다. 초 집은 마치 사생아와 같은 존재였으나 국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초 집이 그토록 성행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초 집이 단순히 학생들이 과거시험 준비를 쉽게 하려는 이유는 생긴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구조적인 문제란 바로 별시(別試) 제도와 서적의 품귀였다.

  먼저 별시라는 것은 일종의 부정기 과거시험이었다. 당시 과거시험은 대체로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식년시가 있었고 그밖에 국가의 경사 등의 이유로 해서 실시하는 각종 별시가 있었다. 이 별시는 중국이나 고려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독특한 제도로서 조선은 이 별시를 자주 실시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백성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과거시험을 실시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결국 별시는 민심 회유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별시가 그 실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그 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빈번히 실시되는 별시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차분히 시간을 갖고 준비하기보다는 짧은 시간 안에 그 대비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별시)로 말미암아 선비의 자제가 학업을 배양할 여가가 없으며 마음도 들뜨게 되어, 동료의 글을 베껴서 요행을 바라는 풍습이 크게 일어납니다.

 

 

  초 집이 성행하게 된 배경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서적의 품귀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적이 대단히 부족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종이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국가의 열악한 경제적 형편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서적의 품귀현상은 곧 서적이 고가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당시에는 "나라에서 가장 귀한 것이 서적"이었으며 심지어 "조정의 관리조차도 사서·오경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다"라고 할 정도였다. 과거시험 준비에 기본이 되는 서적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가 과거제도를 실시할 물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과거 준비에 필요한 책을 구입할 수 있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시험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편법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초 집의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초 집이 성행하게 된 이유는 과거시험 출제 방식이 소위 '문제은행식'이어서 한번 출제된 문제가 시간이나 장소를 달리해서 다시 출제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 집은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 이건 혹은 초 집이 지니는 이점 때문이건 간에 조선시대 과거 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게 널리 퍼짐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관학 교육을 기피하게 했고, 임기응변식의 학습 태도를 조성하는 등 당시 교육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을 잘 대변하는 또 다른 하나는 경학을 기피하려는 풍조 했다. 경학이란 문자 그대로 경서 즉 4석 3경 공부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에 과거시험 과목 중 경서 지식을 구술시험으로 확인하는 "강경(講經)"에 대비하기 위한 공부였다. 그런데 강경은 실제로는 경서의 암기 정도를 시험하는 것이었으므로 경학은 곧 암기 위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4석 3경을 다 외운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강경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경학은 대단히 힘든 공부로 인식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다음과 같이 경학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실학(경학)은 글 읽기가 몹시 괴로운데 유생들이 실학을 읽지 아니할지라도 때로는 요행히 과거에 급제할 수도 있으니 어찌 괴롭게 글을 읽으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경학의 기피라는 것은 당시 교육의 기본이 되는 경서의 학습에 소홀히 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당시 학생들의 학력을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경학의 기피 풍조는 학생들의 현저한 학력 저하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유생들이 모두 경서를 통하지 못해···논어·맹자의 첫 부분조차 해석하지 못하니, 그 나머지는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논어》·《맹자》는 경서중에서도 비교적 쉬운 내용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첫 부분도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당시 학생 중 많은 수가 경서 전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학생들의 실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과거를 통해 인재를 확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당시 강경시험에서는 합격자가 정원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학생들의 학습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학습 방법은 곧 암기 위주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가 결국은 암기력을 확인하는 시험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제도에 숨겨져 있는 의도는 학생들이 과거 공부를 하면서 경서 내용이 그들의 도덕률로서 내면화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수험생들의 교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학생들이 단순히 암기에만 치중함으로써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공부란 단지 수단일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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