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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柳馨遠:1622-1673)
유형원(柳馨遠:1622-1673). 호는 반계(磻溪). 경세치용(經世致用) 의학을 체계화한 실학자로서 과거 준비 중심의 교육 현실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써 학교 교육을 토대로 한 공거제(貢擧制)를 주장하였다. 저서로는《반계수록》이 있다.
유형원의 실학사상은 다른 실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실학자들의 교육 개혁론 중 서로 유사한 부분들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형원의 교육개혁안은 실학자들의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형원이 당시 교육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역시 과거 준비 위주의 교육이었다.
그는 ①문예 일변도로 흐름으로써 도의 교육이 소홀히 되는 당시 세태, ②아무리 학식과 도덕성을 겸비해도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는 당시의 현실, ③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대부분 서울의 세력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라는 점과 이에 따라 지방 학생들이 사기가 떨어져 학력이 저하되는 문제, ④자주 실시되는 별시가 한 번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학생들이 요행을 바라고 학업에 열중하지 않게 되는 당시의 풍조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앞서 언급했던 조선시대의 교육 현실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유형원이 당시 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유형원이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대안은 바로 공거제(貢擧制)였다. 공거제란 과거제처럼 시험을 통해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을 통해 양성한 인재를 시험 없이 추천(천거)으로써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지금의 학교장 추천제와 유사하나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공거제는 학교 교육을 토대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 제도의 확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형원이 제시한 학제에서는 종전의 학제와는 달리 학교 간의 위계성 및 계열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공거제가 일련의 학교 교육만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단계마다 철저하게 학생들을 걸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의 학제 개혁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초등학교라 할 수 있는 방상과 향상의 설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의 정원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보편화되어 있었던 서당교육을 초등 관학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정원을 개봉한 것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초등교육의 확대를 염두에 둔 데 따른 것이라고 보인다. 또한 학교 교육의 성패는 교사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고 당시 천시되었던 교관에 대한 인식 제고와 사학(四學)에 전임 교관 배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지방 교관의 경우 가족을 거느리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함과 동시에 임기가 찬 후에는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시킬 것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유형원의 교육개혁안은 종전처럼 집안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교육 기회가 결정되고, 나아가서는 관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좌우되는 당시 사회의 불합리한 측면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의 개혁안은 학교 교육의 결과를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할 경우 사교육이 큰 변수가 되지 않아 부익부 빈익빈 식의 관리 배출 관행이 시정됨으로써 종전의 과거제가 내포하고 있었던 부정적인 측면의 능력주의적 요소, 즉 경제적 능력만큼 사교육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이것이 과거 합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폐단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유형원의 학 교제와 공거제는 종전보다 더욱더 학식과 도덕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선발할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전의 과거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학교 교육의 목적이 관리가 되는 것일 경우 여전히 성적에만 매달리며, 도덕적이기보다는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을 길러낼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개혁안의 허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형원이 제시한 학교제도는 유교 경전의 하나인 《예기》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것은 곧 그의 교육개혁안이 유교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실학자들의 사고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이후부터는 "선비"와 "서인"을 구분해야 하므로 서민은 더 이상 교육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역시 각 신분에 따라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종전의 유교적 차별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또한 학교 교육 내용과 관련하여 기존의 것과 유사한 《사학》· 《소학》· 《논어》· 《맹자》· 《중용》· 《근사록》·6경· 《사기》·승리서 등을 강조하면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읽지 말 것을 주장한 것을 볼 때 그의 구태의연한 사고의 측면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그가 입학 자격으로 관직자 자제 및 일반 백성 중 준수한 자로 하되 공·상·천인은 제외한 것 역시 기존의 유교적 관행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유형원의 교육 개혁론은 여느 실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결국 국가의 교육정책에 반영되지 못한 채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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