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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역사

조선시대 학교교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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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학교교육 1

앞서 언급한 바처럼 조선시대에 국왕을 포함한 위정자들의 지상과제는 바로 교화였다. 교화의 달성은 곧 이상적 유교 국가의 완성이라는 의미와 함께 국가 안위의 보장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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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사학은 원래 사부학당(四部學堂)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사부학당은 앞서 살핀 고려말의 5부 학당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는데, 형편상 북학을 제외하고 동학·서학·남한·중학의 네 개 학당만을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에 성균관이 대학이었다면 사학은 소학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따라서 학교의 위계 상으로는 성균관의 하급 단계의 학교였다. 특히 사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성균관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성균관 부속학교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사학의 교관을 성균관 교관이 겸직하였으며 둘째, 앞서 말한 것처럼 건 규모 간 정원에 결원이 생겼을 경우 일종의 특차로 입학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사학이 성균관의 부속학교였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사학에 문묘가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만일 사학을 성균관에 딸린 학교였다고 본다면 이처럼 문묘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학을 독립된 학교로 본다면 사학은 당시 관학의 전통이었던 묘 학제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관학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관행상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사학을 성균관의 부속학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사학의 정원은 각 100명씩 도합 400명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숫자는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정원은 조선시대 내내 한 번도 찬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후기에 사학 정원은 각 5명씩 총 20인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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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국학"이라는 명칭이 특정한 기관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단순히 국가의 최고 학부에 대한 범칭인 경우도 있었듯이, 향교 역시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첫째는 지방학교에 대한 범칭으로서 향약(鄕學)과 같은 개념이었다. 둘째는 지방의 특정한 학교를 지칭하는 일종의 고유 명칭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서 향교는 후자를 의미하였다.
  조선시대 향교의 건물구조는 성균관과 동일하며 다만 크기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즉 향교는 문묘와 학교로 구성되며, 다시 문묘는 중앙에 있는 대성전과 그 양쪽의 동·서무가 있고, 학교는 중앙에 명륜당과 그 양쪽에 동·서재가 있었다. 따라서 마치 향교가 성균관을 모방하되 그 크기만 축소해 놓은 것으로 이해하게 될 수도 있을 필요가 있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학교의 전통은 묘 학제로서 문묘와 학교가 합쳐진 형태를 취했다. 학교나 성균관 모두는 이러한 전통을 따른 것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크기에 있어 차이가 나게 된 것뿐이지 처음부터 향교를 성균관의 축소 형태로 설립하려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실로 지리지》에서는 당시에 문묘를 향교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문묘만을 별도로 향교라고 했다기보다는 문묘가 향교의 핵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시대에는 문묘가 없으면 향교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향교의 기원을 논할 때 다루게 되는 고려시대의 지방학교는 문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면 이는 조선시대의 향교와는 다른 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향교 정책의 차이점은 설립 단위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말에는 향교가 군(郡) 단위까지밖에 세워지지 않았음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현(縣) 단위까지 향교 설립을 확대하였다. 향교 설립 단위가 군에서 현으로 확대된 것은 산술적 증가가 아니라 기하급수적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때, 조선의 향교 설립에 대한 열의는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방학교의 설립 정도는 학교 제도 전반의 내실 성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조선의 학교 제도는 고려시대의 그것에 비해 한층 더 높은 완성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향교의 규모는 일률적이 아니었으며, 행정 단위별로 차이가 있었다. 또한 향교의 크기에 따라 학생 정원, 교관의 지위, 학전(學田) 등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 정원: 목(牧) 이상의 향교 90명, 도호부 향교 70명, 군 향교 50명, 현 향교 30명
교관: 도호부 이상의 향교→ 교수 1명(종 6품), 군 이하의 향교 →훈도 1명(종 9품)
확전: 주·부 향교 7 결, 군·현 향교 5 결

 

 

 

  향교의 교육 내용은 유교 경전의 강독과 시나 문장을 짓는 능력을 학습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격시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쓰는데, 조선 초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수학한 후 생원·진사시(소와)에 응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당시에는 지방이 경우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향교에 적을 두어야 했다.
  그러나 향교는 이미 조선 중기 이전부터 쇠퇴 일로를 걷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향교와 과거와의 연계성이 약화하였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세종 때부터 사학(私學) 출신자에게도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지게 되자 향교는 학생들에게 외면당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향교 교관의 무능력 또한 향교 기피의 원인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특히 양반의 자제들은 향교를 떠나 입학하려 했던 것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군역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피력 소로 전락한 향교는 더 이상 교육 기관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대신 문묘에서 봄·가을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석전제와 함께 향사례·향음주례·양로 예와 같은 유교적 의례 행사를 주관하는 기구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학교교육3

서원 일반적으로 서원이라 하면 16세기 이후에 제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학(私學)을 의미한다. 고려말과 조선 초에도 "서원"이라는 명칭의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이것은 후진 교육에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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