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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고려시대
흔히 각 시대마다의 교육을 살필 때는 가장 먼저 그 틀, 다시 말해서 학교 제도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한 시대의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교육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 시대의 교육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라는 발상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안일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교 제도가 그 시대의 교육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는 한 시대의 제도와 실제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양자가 별개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도식적인 이해는 금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시대에 어떤 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의 정원이 몇 명이었다고 해서 실제로도 그만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오류 중의 하나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에 익숙한 나머지 학교가 있었다면 당연히 학생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전통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학력(學歷)이 중시되지도 않았으며, 과거시험과 관련하여 학교가 커다란 이점이 있지도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학교 교육을 지원할 수 있는 국가의 경제력이 충분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전통 시대의 학교, 특히 국가에서 세운 관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굴러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안목은 우리가 각 시대의 교육을 고찰할 때 반드시 지녀야 할 조건이다. 이러한 안목을 견지한다면 우리는 지난날 교육의 심층적인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본자세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한 시대 교육의 실사를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교육이 그들에게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것이다. 교육을 인간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활동으로 인식했는가, 아니면 어떤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은 당시 교육의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려시대의 실태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교육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고려의 역대 왕들의 큰 관심사 중의 하나는 유능한 관리의 확보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떻게 하면 과거를 통해서 양질의 인재를 뽑을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당시의 학교는 바로 과거에 응시할 인재들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인식되었고, 학교의 확충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교육을 관리양성의 수단으로 여기는 고려왕들의 사고방식은 백성들 역시도 교육이 관리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교육이 출세의 관건이 된다는 인식 때문에 백성들은 교육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특히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에 통과해야 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어떤 교육이 과거시험에 얼마나 효과적이냐에 민감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당시의 학생들은 학교 교육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성종 8년에는 "(학생들이) 헛되이 국학에 이름만 걸어 놓고···"라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학생들이 국학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당시가 아직은 과거제도가 활성화되기 전이라서 굳이 학교에서 힘들게 공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후 과거가 중시되기 위해 시작한 다음에도 국학교육에 대한 관심의 정도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국학이 과거 준비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문종이 국자감 학생들이 학업을 폐하는 것은 교관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 지적은 국자감 교육이 교사들의 자질 부족으로 부실했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처럼 학생들이 국학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다른 곳에서 배웠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바로 사학(私學)이었다. 당시 사학에 대한 선호 경향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사학 12도의 융성이라 할 수 있다. 이 12도의 발호 배경이 당시 전란으로 인해 국자감(국학)이 쇠퇴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기는 하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관학보다 사학이 과거 준비를 하는 데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합격이 목적이었던 당시 학생들은 관학이든 사학이든 과거 준비에 더 큰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하려 했다. 당시의 사학인 12도에서는 국자감 교관보다 유능한 교사들이 과거 준비를 시켰기 때문에 학생들이 여기에 몰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은 반대로 관학이 어떤 식으로든지 과거 응시와 관련하여 이 점이 있게 된다면 학생들이 여기로 물릴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에 실제로 이런 상황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예종은 쇠퇴 일로를 걷고 있었던 관학의 부활 책으로서 모든 과거 응시자에게 국자감에서 수학할 것을 의무화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이 조치로 인해 과거 응시를 위한 일차적인 조건은 바로 국자감 재학생이 되었으며 이렇게 되자 당시의 사학 12도 재학생들은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곧 자신들의 스스로를 배반하고 국자감으로 옮겨가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그런데 고려말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벌어지게 된다. 즉 과거와 국학의 연계성이 느슨해지자 같이 국학은 곧 쇠퇴를 면치 못하였다.
오늘날의 관직에 오른 자리도 반드시 과거에 급제한 자가 아니며 급제자라도 반드시 국학을 거칠 필요가 없으니, 누가 지름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겠습니까? 학생들이 흩어지고 학교 건물이 기울어 허물어지는 것도 실로 이 때문인가 합니다.
학교가 과거 준비에 얼마나 유리한가에 따라 이리저리 몰리는 현상은 심지어 12도 내에서도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 때 각 도(徒)의 학생 중 스승을 배반하고 다른 도로 옮기는 학생의 경우는 과거 응시를 못하게 했던 조치는 이를 뒷받침한다.
또 한 가지 유의해서 살펴볼 점은 예종 때 국학에 설치되었던 7배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7 재 가운데에서 6개의 재는 유교의 경서를 가르치기 위한 반이었고, 나머지 한 재는 무술을 가르치기 위한 무학재였다. 예종의 의도는 물론 유학 교육의 진흥에 있었으므로 경학을 다루는 6배에 관심이 더 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과는 경학 6 재는 인기가 없고 오히려 무학재가 선호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무학재 학생들은 과거 급제에 유리했기 때문에 무학재는 다른 6 재보다도 인기가 있었다. 이처럼 과거 급제가 목표였던 고려시대 학생들은 국가의 의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위해 보다 유리한 쪽의 교육을 선택하려 하였으며, 당시 학교들의 융성과 쇠퇴는 이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교육 본래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았었다는 것, 즉 인격이나 교양 함양과 같은 교육의 본질적 측면을 도외시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중국 사신서 그 아이 훌륭하다고 감탄해마지감탄해 마지않았던 고려교육의 장면도 결국은 당시 사람들이 교양을 쌓거나 마음의 수양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시험을 위해 애쓴 흔적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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