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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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역사

고려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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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고려시대의 교육

 

 

통일신라의 교육

삼국시대∽고려시대  시대적 특징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이번에는 고구려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 내었다. 그 후 당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지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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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특징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이전의 고대국가를 운영하였던 원리에서 탈피하여 중세 국가로서의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원리를 채택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유교였다. 태조는 특히 훈요 10조를 통해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예일을 교육으로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치에 임할 것을 후대 왕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런데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통치 이념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불교가 바로 수신(修身)을 위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보다는 상하 간의 질서를 강조하고 있는 유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적합한 이념으로 생각되었다.


  이처럼 통치 이념으로 유교가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교육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교를 존숭 하는 군주였던 고려의 역대 왕들은 유교적 국가로서 손색이 없도록 문물제도의 정비에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중에서도 교육제도의 완비를 국가의 최우선적 과제로 인식하였다.
  또한 고려의 교육은 과거제도는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재를 관리로 선발하고, 귀족들 간에 경쟁 관계를 조성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양화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데 "학교에서 길러 과거를 통해 선발한다"라는 기본정책이 시사하는 것처럼, 고려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밀착되어 있었다. 특히 당시의 과거제도는 교육제도의 뒷받침 없이는 원활하게 운영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의 역대 왕들은 교육제도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한편 고려는 여러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성립됐던 관계로 태조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호족 세력들은 특권층으로 자리 잡아갔고, 고려왕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세력을 어떻게 회유하느냐 하는 것은 왕권 안정의 관건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려의 지방 교육제도 성립은 이러한 호족들의 회유와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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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학교교육
  • 국자감

  국자감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관학이자 당시 최구학부터였다. 국자감의 설립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유교 군주의 지상과제인 교화(敎化)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교화란 국민들을 유교적 이념에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으로서, 예로부터 학교는 교화의 근원으로 인식됨으로써 유교 국가에서는 학교설립이 최우선적 과제였다. 둘째는 학교가 과거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당시 왕들의 생각 때문이었다. 과거제도는 유능한 인재 선방을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권 안정을 위한 장치로 인식되었는데 만일 학교가 없다면 학생들은 공부할 기회 자체가 없게 되어 과거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과거제도는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고려의 왕들은 학교설립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국자감의 특징으로서는 먼저 묘학제(廟學制)를 들 수 있다. 공자를 위시한 유교 성현들을 제사 지내기 위한 장소인 문묘(文廟)와 학생들에게 강의를 실시하기 위한 학당이 별도로 있었다. 이는 문묘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학당 안에 있었던 통일신라의 국학과 다른 점이었다.
  국자감은 흔히 "6학년 4계급"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6개의 학교와 4등급의 입학 자격으로 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자학: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 등
태학: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등
사문학: 문무관 7품 이상의 아들 등
율학·서학·산학: 문무관 8품 이상의 아들과 서인 등

 

 

 

  이처럼 국자감과 구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개 학교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학교의 입학 자격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서·산학의 4단계의 순서로 위계화되어 있었다.
  국자감의 정원은 국 착한·태학·사문학은 《논어》와 《효경》을 선수(先需) 과목으로 하였으며, 경서들을 3개 영역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1개 경전씩을 이수케 하였다. 그 3개 영역은 아래와 같았다.

 

① 《상서》·《공양전》·《곡량전》 (각 2년 반)

② 《주역》·《모시》·《주례》·《의례》 (각 2년)

③ 《예기》·《좌전》 (각 3년)

 

  또한 경전의 학습과 함께 정치적 식견을 진술하는 시무책을 익히게 하였으며, 여가가 있을 때는 글씨를 연습시키되 하루에 한 장씩 쓰게 하였고, 《국어》·《설문》·《자림》·《삼창》·《이어》 등의 서적을 읽게 했다. 한편 기능교육의 경우 율학은 법령, 서학은 팔서(八書), 산학은 산술을 가르쳤다.

  국자감의 교관은 박사와 조교로서 그 직급은 국자박사가 정 7품, 태학박사가 종 7품, 사문박사가 정 8품, 율학박사가 정 8품, 서학·산학박사가 종 9품으로서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교의 직급은 분명치 않으며 다만 기록에 율학 조교가 종 9품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의 국자감은 대체로 당의 국자감과 유사하였다. 차이점이었다고 한다면 우선 학생 정원에 있어서 당의 국자감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과 고려의 인구 차이를 감안하면 이것은 당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입학 자격을 비교해 보면 특히 두 나라의 사문학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당의 사문학은 서민들에게까지 개방되었던 것에 비해 보려는 문무관 7품 이상의 아들에게 준하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만 입학을 허락했다. 이는 한마디로 고려 국자감이 당에 비해 다소 폐쇄적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의 국자감 조직은 예종 4년(1109) 국학에 7 제(齋)가 설치됨으로써 변화하게 된다. '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반(班)과 같은 것으로서, 7 재란 일곱 개의 전공 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로부터 6개의 재는 유학 전공 반, 나머지 하나는 무예 전공 반이었다. 특히 무예 전공의 강예재는 고려시대의 국학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었다.

  또한 예종 14년(1119)에는 일종의 장학재단이라고 할 수 있는 양현고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충렬왕 때 와서 양현고 재원이 바닥이 나자 안 향이 관리들로부터 금전을 걷어 다시 재원으로 충당하였다. 안 향은 양현고 재원을 축내지 않고 운영하기 위해 대부를 해주고 받는 이자로써 학생 후생 경비를 확보토록 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마련된 경비를 섬학전(贍學錢)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섬학전 제도는 국학의 학생 후생비용 운영 방식에 있어서 큰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국학(국자감)의 강화는 왕권 강화와 맞물려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학은 바로 국가 위신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역대 왕들의 국정 쇄신을 위한 노력 중에서 이러한 국학의 정비가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처럼 국학에 대한 집착은 그 운영상에 있어서 무리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단적인 예가 바로 학생 정원 문제였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국자감의 정원은 국자학·태학·사문학을 합쳐 900명이었다. 이 숫자는 당의 국자감 정원 2,100명과 비교하면 분명히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중국과 고려의 인구비례로 볼 때나 혹은 재정적 능력으로 볼 때 이 900명은 대단히 많은 정원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성균관의 경우 정원이 200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려시대 국자감의 900명이라는 정원은 현실성이 결여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다음과 같이 국자감의 개혁을 요구하는 상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국학에서 선비를 기르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많아 실로 민폐가 되고 있으며, 또한 중국의 제도를 우리나라에 행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니 혁파할 것을 청합니다.

  국학에서 선비를 너무 많이 기르기 때문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청컨대 행실이 닦여지고 학업이 성취된 자 약간 명만 가려 재학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보내소서.

  이처럼 국학의 운영비가 국가의 능력에 비춰볼 때 대단히 과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학을 없애거나, 최소한 정원축소에 대한 요구가 제기되었다. 특히 두 번째 상소의 경우는 당시 국학의 정원이 200명으로 감축되었던 시점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국학 운영을 위한 고려의 재정 능력은 대단히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지방 학교(향학 또는 향교)

  고려는 건국 초부터 지방학교가 존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단적인 예는 "태조 13년(930)에 왕이 서경(평양)에 행차하여 학교를 창립하고···"라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학교는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아니었고 서경과 같이 중국과 인접한 중요지역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의 지방학교는 성종 6년(987) 전국의 12목(牧)에 대한 박사 파견을 계기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박사 파견은 유 수습 업체 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당시 지방의 호족 자제들을 상경시켜 수학하도록 한 제도로서 일종의 볼모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분상으로는 지방에 학교가 없기 때문에 호족 자제들을 위해 국가에서 교육상의 편의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 후 성종은 얼마 되지 않아 이들 호족 자세들을 희망자에 한해 귀향시킴과 동시에 전국의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각각 1명씩 파견하여 지방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곧 각 지방에 학교가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세워진 지방학교를 "향교(鄕校)"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바, 향교는 그 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향교라 하면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향교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향교는 특수한 건물구조, 즉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에 대한 제사 공간인 문묘와 함께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공간인 명륜당으로 이뤄진 지방학교를 의미하게 된다. 한편 향교는 단순히 "지방학교"의 의미로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의 향교는 앞서 살펴본 "향학"과 같은 말로써 여기에는 모든 지방학교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조선시대의 향교와는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향교의 기원이 언제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성종 때 지방학교 확대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인종 5년(1127) 전국 각 주(州)에 대한 학교설립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이 밖에도 충렬왕 때 처음으로 문묘가 세워졌다는 기록을 들어 이때부터 향교가 시작되었다는 주장과, 태조 때 서경에 세운 학교가 향교의 효시였다는 주장들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향교 기원설들은 어느 것 하나 확고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잇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향교의 개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향교를 단순히 지방학교로 규정할 것인지, 아니면 조선시대처럼 문묘가 있는 지방학교로 볼 것인지에 따라 그 기원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고려시대의 지방학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태조 때 처음으로 지방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후 점차로 확대되었을 뿐만 즉 태조 때 처음으로 지방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후 점차로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 또한 변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고려시대의 지방학교의 설립 과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태조 13년 서경에 지방학교 설립→ ② 성종 6년 전국 12목으로 확대→ ③ 인종 5년 전국의 각 주에까지 설립→ ④ 고려말 정몽주에 의한 증설

 

  또한 고려시대의 지방학교 건물구조는 ① 초기: 학당만 존재 ② 중기: 공자묘와 학당이 같은 건물 안에 존재 ③ 말기: 공자묘와 학당의 분리의 순서로 변천되어 왔다고 설명할 수 있다.
  고려시대 향교의 교육 내용은 일정치 않으나 당시 과거시험 과목이었던 명경과 제 술에 대비하기 위한 유교 경전의 학습과 시(詩)·부(賦) 등을 짓는 문학 수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각 시대마다 지방 교육에 대한 관심 중의 하나는 어느 행정단위까지 학교가 설립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고려시대 지방학교 설립 과정의 특징을 보면 역시 행정단위 크기를 중심으로 하여 하향적으로 설치되어 왔다. 즉 경(京) →목(牧)→주(州) 단위 순서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결국 현(縣) 단위까지는 확대 설립하지 못하였다. 현의 숫자는 주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셈이 되기 때문에 현에 학교를 설치했느냐의 여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학당

  학당은 고려시대 말기에 등장한 중앙의 학교로서 원종 2년(1261)에 동서 학당으로 시작하였다가, 그 후 정몽주에 의해 5부 학당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안(중앙)으로 5부 학당을 세우고 밖(지방)으로는 향교를 설치하여 유술(儒術)을 진작시켰다"라는 내용으로 미뤄 볼 때, 학당은 향교와 동일한 수준의 학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국자감이 존재했던 점을 감안할 때, 학당과 국자감은 교육 수준에 따라 위계적으로 분화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국자감은 상급 교육을 담당하고 학당은 하급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사학(私學)

① 12도

  고려시대의 사학으로는 먼저 12도를 들 수 있다. 여기서 '도'는 교습을 위해 사적으로 맺어진 교사와 학생들의 무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도'가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것은 신라의 화랑도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도'라는 것은 특정 교육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각 '도'의 교육 장소는 유동적이었는데 특히 한여름에는 시원한 절간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이와 같은 무리가 12개가 있다고 해서 "사학" 하면 으레 "12도"로 불렸다. 그런데 처음부터 12개의 무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개의 '도'로 출발했던 것이 호응을 얻게 됨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다투어 도를 만들게 되어 나중에는 그 수가 12개가 되었다. 그중에서 12도의 시초이자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최 충의 문헌공도(시중 최고도)였다. 최 충은 목종 8년(1005)에 과거에 급제한 후 문종 대까지 5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거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최 충은 말년에 벼슬을 그만둔 뒤 후진 양성을 위해 사학을 세워 9경·3사·제술 등을 가르쳤다. 이를 계기로 많은 수의 학생이 몰리게 되자 9개의 교실이라 할 수 있는 9 재를 설립하여 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2도는 그 교육 내용으로 미뤄볼 때 당시 최고 수준의 교육을 실시했던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2도는 당시 관학이었던 국자감의 쇠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자감의 쇠퇴가 12도의 발호를 가져왔는지, 아니면 거구로 12도의 융성이 국자감의 부진을 초래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12도는 대체로 묻어두는 여름철에 절에서 강습회를 여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때는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직 관직에 들지 않은 학생들로 하여금 강의를 담당케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그들이 당시 과거시험 출제 경향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최 충의 문헌공도에서는 하기 강습회 때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실시하였다. 이는 초에 금을 그어 놓고 그 금까지 초가 탈 동안 부(賦)와 시(詩)를 짓게 하는 시험이었는데, 좋은 글을 지은 학생들은 그 순서대로 방을 붙이고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결국 각촉부시는 모의 과거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2도의 중요한 목적은 과거 준비였다. 당시 12도 중에서 문헌공도가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과거 합격률이 제일 높았기 때문이다.
  12도는 교육을 목적으로 사적으로 결성된 집단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학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국가가 그 운영에 관여함으로써 그 성격이 모호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에서 12도 교육의 안정을 위해 그 학생들의 거취를 제한했다거나, 또한 고려말에는 국자감과 향교 사이에 12도를 중간단계로 하는 학교 체제를 구상했다든가 하는 사례들은 12도가 준 관학으로 변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당시 국자감이 유명무실한 상태에서는 12도가 국가의 기본 교육정책에 위배되지 않게 교육을 하는 한 이를 장려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이 12도 교육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② 사숙(私塾)

  사숙이란 당시에 보편적으로 쓰였던 명칭은 아니다. 흔히 사숙은 개인에 의해 세워졌던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교육 공간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시대의 서당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12도와는 별도로 작은 규모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사숙 교육을 통해 많은 수의 학생이 과거에 합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이와 같은 사적인 교육이 얼마나 성행했는가 하는 것은 당시 중국 사신이었던 서 그 아이 쓴 《고려도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舍)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자제로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 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장성해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어린아이들에게 이르기까지 마을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 훌륭하도다. 

 

고려시대 교육 읽기

삼국시대∽고려시대    흔히 각 시대마다의 교육을 살필 때는 가장 먼저 그 틀, 다시 말해서 학교 제도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한 시대의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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